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이 책은 25년 전에 발표된 『사진에 관하여』(1977)와 이어지는 전쟁을 다룬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 또는 이미지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언제가 이 책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관심사는 ‘사진’이라는 것의 극히 일부분의 조각이다. 사진 자체가 조각인데 그것의 조각이라니, 그뿐만 아니라 작은 일부분의 조각이라니 참, 말이 어렵다. ‘사진을 본다’는 것의 시작은 수동성이다. 내가 보려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볼 수밖에 없다.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14쪽

책상 앞에 놓인 아이의 사진이나 애인의 사진은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언제라도 볼 수 있고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볼 수 있게 늘 앞에 놓아둔다. 지갑을 열 때 의도하지 않게 보는 자신의 증명사진과는 느낌이 다르다. 늘 보는 사진이건 힐끗 보게 되는 사진이건 느긋하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참 행복할 듯하다. 내 조급함인지, 사회성으로 인한 성급함인지, 어떤 것의 길들임인지, 다양한 이유로 행복을 놓치고 있다. 빼앗긴 건가? 누구로부터?

애인, 가족, 친구와 같이 어쩌면 타인이지만 타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그들을 보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더불어 가능하다면 동시다발적으로 진정 타인으로 생각하는 어떤 자 또는 오늘 뉴스에서 보았던 어떤 사진을 떠올려보자. 누군가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것은 나에게 참 버거운 일이다. 처음에는 가능할 거 같다는 생각에 흥분되었지만 결국 대상은 모두 흐릿하게 사라져 버리고 그 중간을 종횡무진 오고 가는 잔상만이 남게 되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그 잔상을 촬영할 수 있다면 지금 내 생각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부질없는 상상이 스쳐 지나간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은 결코 만날 수 없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그런 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뉴스를 통해 수 차례 보도되는 지구 어느 곳의 전쟁 소식은 그런 타인의 이야기인 셈이다. 무관심 속의 연민으로 지구본을 돌려 보는 자는 그래도 대단하다 칭찬하고 싶다. 난 학창 시절,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었던 몰지각한 학생이었다. 무관심 속의 연민으로 시작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것이 관심으로 표상되고 그것이 양심을 두드릴 수 있는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두드리다 보면 동요로 인해 언젠가 저 두터운 양심의 성벽이 무너질지 모르니. 그렇다면 결국 시간의 문제인가?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중략)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위의 책, 153-154쪽

생각해보니 양심의 성벽을 두드리기 보다는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양심의 문을 찾는 게 더 수월할 듯싶다. 문을 두드리는 게 인정 없는 성벽을 두드리는 것 보다 손도 덜 아프다. 그렇다면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그 문을 제시했을까?

어떤 하나의 이미지(또는 한 다발의 이미지)를 보여줘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도록 움직일 수 있을까? 서사체의 이야기는 이미지보다 훨씬 더 효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간의 길이에 관한 문제이다.

위의 책, 179쪽

수전 손택이 1992년 제프 월의 “죽은 군대는 말한다(매복 뒤의 소련 정찰군 모습. 1986년 겨울, 아프가니스탄의 모코르 근처)”라는 제목의 거대한 반전 이미지(스튜디오에서 촬영된 합성사진)를 제시하긴 했지만 결국 그 문은 영화이다. 하나의 사진이건 연작이건 보는 이를 쉽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물론, 숙면을 취하는 것으로 지루함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영화는 계속 볼 수 밖에 없다. 지속적인 이미지의 방출, 붙잡고 싶지만 붙잡을 수 없으니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영화이다.

수동적으로 앉아 있다고 해도 결국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아니 행동한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로 볼 때 문제는 시간이다. 그리고 잴 수 없는 그것의 길이다. 붙들려 있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미덥지 못한 결론이다. 진정 수전 손택은 영화가 문이라고 말한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그렇다) 마지막 지면은 앞서 언급한 제프 월의 합성사진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 그들. 철저히 우리를 외면하고 살아 있는 것에 무관심한 그들을 이야기하며 아래와 같이 말한다.

[그들이 말해준다 해도] ‘우리’, 즉 그들이 겪어 왔던 일들을 전혀 겪어본 적이 없는 ‘우리’ 모두는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위의 책, 184쪽

아, 결국 시간의 문제였다. 우리를 붙잡는 그 시간. 정확히 말하면 내가 붙잡고 할애하여 그것을 진정 알고자 하는 그 관심의 시간 말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무관심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양심의 중심에는 ‘자신’이 존재한다. 그것을 둘러싼 저 두터운 성벽과 문을 만든 것도 결국 자신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수전 손택이 이 책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타인에 대해 연민을 끝내고 양심에 대해 진실하게 생각하기를 희망했다.

불이 난 쓰레기통을 보고 불 낸 자를 욕하지만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 앰뷸런스가 긴급함을 알리는 사이렌을 울리지만 경적을 울리며 그 혼란스러움을 짜증내는 사람, 큰소리로 외친 소리는 두터운 성벽을 넘어 울려 퍼졌지만 정작 그는 문을 열고 나와 불을 끄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전쟁 속에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타인에 대한 양심? 나와 타인만을 놓고 보자면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사소한 사건이 양심의 명령을 듣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전 손택의 바람처럼 스펙터클이 아닌 실재 세계에서 사는 우리는 이것을 자각하고 문 밖으로 걸어 나와 남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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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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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비밀댓글입니다

      • 박평종 선생의 글을 읽다가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언급되었습니다. 글을 읽고 나니 결론은 껄끄러운 사안에 대해 작정하고 총대를 메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난 <타인의 고통>을 읽고 어떻게 글을 풀어 놓았을까 궁금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글을 읽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다행입니다. 당시에는 댓글을 발견 못했는데 이제라도 발견해서 말이죠. 변명을 좀 하자면, 다른 곳에 올렸던 기사를 몇 편씩 옮기면서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책을 읽고 참 먹먹하네요. 타인의 고통도 그렇고 기타 여러가지 얘기가 말이죠. 관련해서 글로 정리해 보겠지만, 일단 타인의 고통에 대해 좀 정리를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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