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익명화 그리고 개성이 사라진 초상사진

알렉산드로 로드첸코, 〈전화기 앞에 있는 여자〉, 1928년 (사진출처=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Mr. and Mrs. John Spencer Fund. ⓒDACS 2004)

드디어 《1900년 이후의 미술사》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이론을 궁금해 하는 사진가면 대부분 읽는다는 그의 짧은 글, 〈사진의 작은 역사〉와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 언급되고 있더군요. 대부분 후작 얘기라 예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전작부터 다시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작은 역사〉를 읽은 분이라면, 외젠 아제의 적막한 파리 거리의 사진과 사진 표제를 강조하는 벤야민의 말이 인상 깊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벤야민은 늘 대상의 껍질을 벗겨 동등하게 대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했지만 말이죠. 어쨌거나 그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의 상실을 포착하는데 있어 사진이 기가 막힌 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상사진은 알렉산드로 로드첸코의 〈전화기 앞에 있는 여자〉(1928)처럼 익명적이고 아우구스트 잔더의 《시대의 얼굴》(1929)처럼 사회학적인데, 그들의 사진에서 개인주의는 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소개한 네덜란드 개념 예술가이자 거리 사진작가, 한스 에이켈붐의 《People of the Twenty-First Century》(2014)도 그런 탈개성화를 잘 보여주는 사진집입니다.

“미래의 문맹자는 문자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사진을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사진들을 읽을 줄 모르는 사진사 또한 그에 못지않게 문맹자가 아닐까? 표제를 다는 일은 사진촬영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발터 벤야민 선집 2》.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196쪽.

벤야민이 말한 표제의 중요성은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표제를 말하는 것일까요? 상황을 알려주는 의미일까요, 사진을 촬영한 장소를 알려주는 의미일까요, 보도사진에 이용되는 방식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떤 방식으로 표제를 달기 원했을까요. 무수한 질문을 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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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발터 벤야민의 표제와 관련한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이미 현대 잡지가 많이 채택 해왔던 것처럼 사진 이미지에다가 크게 제목을 다는 방식을 연상했었습니다. (이니그마님 블로그: http://blog.naver.com/gloriousld/150183991438)

        미학사적으로는 중세 시대까지 회화 작품에다가 "문장"을 적어 놓았던 것이 근현대 회화에서 사라지게 되고, 다시 활자 매체가 사진 이미지와 함께 결합하게 되는 변증적 현상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네요. ㅎ

      • 하하, 즐거운 글입니다. 말씀하신 곳을 들러보니 과거 러시아에서 유행한 포토몽타주의 표제가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이후 표제는 빅터 버긴과 같은 사진이론가가 사진에 글을 적기도 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사진과 글의 앙상블은 사진과 글을 따라 분리해서 생각하는 입장, 그러니까 사진만으로 표현이 가능하다는 입장 차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사진만의 힘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더군요.

        존 버거의 말처럼 사진이 반언어의 성격이라면, 사진의 부족한 면을 기존 선형 방식의 문자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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