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촬영자의 의도를 그대로 구경꾼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요즘 드는 생각은 (매일 요즘이지만) 촬영자와 구경꾼의 차이는 무얼까 싶은 겁니다. 여러 경우 수가 있겠지만, 범위를 좁혀서 촬영자가 구경꾼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가능할까요.

먼저, 제가 생각하는 촬영자는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고, 사진을 찍는 모든 사람이라는 전제로 시작해봅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구경꾼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이겠죠. 둘은 결국 하나인데, 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이제 《1900년 이후의 미술사》를 등장시켜 봅니다. 어제 공부했던 것은 1936년 설립된 미국 농업안정국(FSA, Farm Securities Administration)의 의미와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로이 에머슨 스트라이커(Roy Emerson Stryker, 1893-1975)의 생각이었습니다.

도로시어 랭, 〈이주민 어머니〉, 1936년.

스트라이커의 생각은 도로시어 랭의 〈이주민 어머니〉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로로 구성된 흑백 사진 속에는 두 어린 아이가 보입니다. 아이들은 머리가 헝클어지고 구멍이 뚫린 옷을 입고 있군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들은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의 양 어깨 위에 얼굴을 파묻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에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 어머니가 있습니다. 확연히 보이는 이마주름 때문인지 근심이 가득해보입니다.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통해 스트라이커가 진행했던 사진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성격, 그러니까 ‘인간주의 리얼리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대공황에 빠진 미국 농촌에서 두 아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힘든 삶을 살고 있지만, 역경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있음을 그녀의 얼굴을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반면, 역사가 앨런 트라텐버그(Alan Trachtenberg)는 스트라이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사진을 바라봤습니다. 바로 도시 자본화에 의해 농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봤던 거죠. 이런 관점에서 다시 랭의 사진을 보면, 어머니의 응시가 역경을 이겨내려고 하는 의지 어린 행위보다는 낙담으로 느껴집니다.

초기 의도했던 촬영자가 곧 구경꾼의 입장이라는 취지와는 다릅니다만, 스트라이커가 뚜렷하게 일관된 의지로 여러 사진가의 작업을 분류했고 그것을 바라봤다면, 결국 촬영자는 자신의 사진을 볼 때 구경꾼이 될 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의미로 촬영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진 촬영을 했더라도 구경꾼은 달리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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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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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0

      • 투영과 일치감을 부여하는 사진... 요런 뜻이 떠오릅니다.

        한번더 생각하게 끔하는 사진 이야기 좋습니다.^^

      • 이런 얘기는 옹기종기 모여서 나누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소모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서토론을 통해서 서로 얘기를 나누면 참 좋겠습니다. ^^

      • 대단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아는 분이 시를 쓰시는 데..본인의 시가 교과서에 올라가서 참고서를 봤더니 자기가 서정시인으로 정의되고 있다더군요.. 본인은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는데 말이죠..

      • 촬영자와 구경꾼 사이를 설명하는 한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끔은 내 사진은 내게 이렇게 보이는데 다른 이에게 어떻게 보일까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여튼, 말씀처럼 참 어렵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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