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정확하게 똑같은 반복을 통해 스투디움을 지나 푼크툼에 다다를 수 있을까?

앤디 워홀, 〈불타고 있는 흰색 차 Ⅲ〉, 1963년

사진 한 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꼭 그렇지는 않죠. 이런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반복을 통해 사진을 보면 좀 더 의미나 사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반복은 유사함의 되풀이인데,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은 똑같은 것을 되풀이합니다.

워홀의 반복은 외상적 현실을 가리고, 그러니까 동일한 사건 장면을 반복함으로써 관람자는 무감각해지는데, 이것을 알아챈 관람자 내부의 균열을 통해 작동합니다. 이 외상적 지점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은 단지 개인 사건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차원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은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개인 차원에서 이뤄질 뿐 이론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작되는 듯합니다. 푼크툼의 유아론을 극복해 개인 차원이 아닌 모두가 생각해볼 수 있는 차원으로 확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는 반복 효과에서 외상을 제외하면 워홀의 반복은 바르트가 말한 스투디움 영역에 포함됩니다.

바르트는 스투디움을 “스투디움을 인정하는 것은 사진작가의 의도를 숙명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이지만, 언제나 내 자신 안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투디움이 속하는) 교양/문화는 창조자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계약이기 때문이다. 스투디움은 일종의 교육(지식과 예절)이다.”(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43쪽)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워홀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워홀은 자신의 반복 효과를 “계속해서 몇 번이고 끔찍한 그림들을 보게 되면, 그 그림은 실제로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1900년 이후의 미술사》, 세미콜론, 2012, 534쪽)고 말했습니다. 그의 의도가 이렇고 성공했다면, 관람객은 워홀의 작품을 보면서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거리를 두는 상태가 될 듯합니다. 그러나 의도와는 달리 우리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반복되는 참혹한 뉴스로 감각은 무뎌지지만, 우울함이 증가되는 효과와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는 워홀의 작품을 통해 상처를 받습니다. 책에서는 이를 멜랑콜리가 드러남을 말합니다. 이제 워홀의 반복이 스투디움이 아닌 푼크툼이라 이해하려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푼크툼은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푼크툼은 또한 찔린 자국이고,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고, 작게 베인 상처이며―또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트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뿐만 아니라 나에게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롤랑 바르트, 《밝은 방》, 42쪽)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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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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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2

      • 머리가 아닌 가슴이 불편해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지네요.

      • 이성과 감성을 따로 분리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체계화된 지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은 늘 머리가 아픕니다. -_- 김사익 님 말씀처럼 뭔가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 늘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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