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다니엘 뷔랭이 말하고자 했던 것

다니엘 뷔랭, 「사진-기억: 회화-조각」(부분), 제6회 〈구겐하임 국제전〉에 설치,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1971년

오늘 읽은 글은 미니멀리즘의 한계들이란 것으로 어제 읽은 글(“추한 것에 더 매력을 느낀다고 하지 않았나”)과 이어져요. 한스 한케는 「샤폴스키와 그 밖의 여러 명의 맨해튼 부동산 소유권」(1971)과 「솔 골드먼과 알렉스 디로렌조의 맨해튼 부동산 소유권」(1971) 작품을 통해 사진이 지켜야만 했던 중립성, 그러니까 사회적·정치적 중립성에 저항했다고 하네요.

한케 이전에도 사진 저널리즘이 있었는데 왜 유독 한케 작품이 그렇게 평가 받는지 고민을 좀 해보니 미술관이라는 제도권에서 지키려 했던 중립성과 연관이 있겠더군요. 여하튼 오늘은 그 두 번째 사례로 다니엘 뷔랭이 등장해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된 뷔랭의 「사진-기억: 회화-조각」 작품은 커다랗군요.

원통형 미술관을 관통하는 현수막이라고 하는데 사진으로만 봐서는 이해가 잘 안되네요. 보통 건축은 시각보다는 촉각 체험이라고 하죠. 실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직접 설치된 현수막을 봐야 ‘이것이구나’ 하고 느끼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시지각만으로 이해해보려니 그게 참 안되네요.

어쨌거나 한스 작품은 그와 미술관의 충돌이었다면 재미있게도 뷔랭 작품은 그와 다른 작가들, 그러니까 미니멀리즘 작가와의 충돌이더군요. 몇몇 미니멀리즘 작가가 뷔랭의 작품이 자신들의 작품을 가린다는 거죠. 책에서는 이것이 핑계였다고 합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반대 입장은 미술관에 놓인 작품은 관람객에게 중립적인 시각과 경험을 보장한다고 하는데 뷔랭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이것의 사례로 적당한 영상이 있습니다. 이전에 소개한 것으로 10유로짜리 그림이 미술관에 설치되고 그것을 본 관객은 중립적 시각이 아닌 이념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사진과 텍스트: 샤를 보들레르의 말처럼 사진은 그저 물질과학의 결과물일 뿐인가?”)는 내용이에요. 여하튼 오늘 읽은 글(어제 읽은 글도 포함)의 주요 핵심은 1970년대 초반에 나타난 개념주의의 제도 비판이라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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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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