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어떻게'와 '왜'는 공존할 수 없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박현석 옮김, 동해출판, 2004

개인이 사회 집단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와 접촉하며 살아간다면 사회구성원이라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사회구성원이라면 ‘어떻게’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진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겨울을 날 수있을 것인가”

반면, 사회구성원이 아니라면 어떨까? 당신은 머리속으로 ‘왜’라는 답변을 했을 수도 있다. ’왜 살아가는가’와 유사한 사례가 생각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사회구성원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어떻게’라는 사고에 집착한다. 의아스럽지 않은가?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2년여 동안 숲 속 생활을 하며 자연을 통해 이성적으로 인생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의·식·주 욕망을 최소화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육체적 노동과 독서, 사색 그리고 자연을 통해 현상을 바라봤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도심 속 생활에서 소로의 이성적 행동이 가능했을까?

“카도는, 한 집안의 가장은 시골의 별장에 ‘기름과 술을 저장할 수 있는 지하실과 그것들이 들어 있는 수많은 통들을 준비해 두워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고난의 시기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가장의 이익이며, 덕이자, 명예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지하실에 감자가 든 작은 통 하나, 벌레가 쏠은 완두콩 2쿼트를 저장해 두고 있었으며, 찬장에는 소량의 쌀과 당밀 한 병, 호밀과 옥수수 가루를 1펙씩 저장하고 있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는 욕망이라는 두 글자 앞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만 그 유혹의 강도가 다를 뿐이다. 생물학적 욕구는 해소될 수 있지만 사회적 욕망은 끝이 없다.

이듬해 겨울에는 절약을 위해서 조그만 조리용 난로를 사용했다. 〔…〕 그래서 조리의 대부분은 더 이상 시적인 행위가 아닌 단순한 화학적 변화 과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나는 왠지 친구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 노동자는 밤이 되면 그것을 가만히 응시함으로써 낮 동안에 쌓인 먼지와 속세의 더러움을 털어내고 자신의 사상을 정화한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불을 바라볼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들을, 두려워하는 일도 없이.

언제나 앞쪽에 열려있는 벽난로 대신 조리용 난로를 선택한 소로는 깊은 사색에 빠지고 만다. 벽난로에서 풍겼던 나무 타는 냄새, 불빛 그리고 흐릿한 그림자 속에 나타나는 유령을 그리워한다. 비록 숲을 생각하고 나무를 절약하기 위해 조그만 조리용 난로를 선택했지만, 결과론적으로 생물학적 욕구를 없애기 위해 사회적 욕망을 선택한 셈이다.

우리는 항상 이런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와 ‘왜’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성적 행동이 필요하다. 당신은 주변의 변화에 대화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도 월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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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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