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이해, 사진이 주는 메시지가 마지막에 의미하는 것

존 버거, 『사진의 이해』, 제프 다이어 엮음, 김현우 옮김, 열화당

나는 이것을 보는 행위가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라는 말은 이제 이것이 유심히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는 나의 믿음은,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보여 주지 않기로 한 모든 것들에 비례한다라고 풀어써야 할 수도 있다.

존 버거, 『사진의 이해』, 제프 다이어 엮음, 김현우 옮김, 열화당, 2015, 35쪽

사진이 주는 메시지가 마지막에 의미하는 것은, 본다는 의지보다 보여준다는 의지이다. 존 버거는 사진을 꼭 예술작품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여길 수 있다고 일러 준다. 그가 생각하는 사진은 예술 틀 바깥에 있다. 예술 틀 바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깥에는 소유할 수 없고, 결코 그럴 수 없는 진실(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이 존재한다. 예술은 늘 자세한 것을 두루 쓰이는 것으로 바꾼다. 그래서 우리는 틀 바깥을 이해하는데 예술작품에 빚을 진다.

사진으로 틀 바깥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예술작품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버거는 우리가 사진을 대할 때 예술작품으로도 여기거니와 초상화, 뉴스로도 여긴다는 것을 집어낸다. 무엇으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사진은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버거가 말하는 본다는 의지보다 보여준다는 의지라는 의미이자, 사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결국, 사진은 보여준다는 의지를 통해 무기가 될 수 있다.

카메라는 기계이다. 이런 물질성을 생각하면 산업혁명 때 많은 사진이 널리 쓰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버거는 세계대전에서 쓰인 사진에 주의를 기울인다. 사진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를 버거는 산업혁명보다는 세계대전에서 찾는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닌, 그러니까 내가 보여주지 않기로 한 모든 것들 가운데 보여주기로 한 일부분이 메시지이자, 전부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진으로 변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한번 생각해볼 문제이다.

사진이 우리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은 누군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흔히 이를 모호하다고 말한다. 사진 속 겉모습을 보며 그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지언정,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알기 힘들다. 어떤 사진가는 이를 한탄하며 이렇게 말한다.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 사진가는 단지 겉모습을 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본다는 것은 의지이다. 사진에 그 의지가 함께 할 수 있길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수수한 바람은 이뤄지기 어려워 보인다. 사진은 본다는 의지보다는 보여준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이미 지나간 순간이다. 그 순간을 뚝 잘라 놓은 것이 바로 사진이다. 이렇게 사진은 보는 의지와 이어져있지 않다. 눈으로 보는 것은 이어져있다. 뭔가를 본 사진가는 어떤 일이 일어난 자리에 있었고 그것과 함께 했다. 물론 사진은 그렇지 않다. 그럴 수도 없다. 끊긴 것, 잘라진 것, 지나간 것. 이런 겉모습을 꾸민 말과 사진은 같다. 결국, 본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여준다는 의지를 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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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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