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운명: 불친절한 읽기

맥락이라는 말을 자주 본다. 맥락은 ‘혈맥이 서로 연락되어 있는 계통’을 뜻하기도 하지만 보통 ‘사물이 서로 이어져 있는 관계나 연관’을 말한다. 책 읽고 쓰기, 그러니까 서평에 나타나는 맥락은 여러 꼭지가 어떤 입장으로 이어져 있는지 살펴봄을 뜻할 것이다. 책 읽는 사람은 이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 읽는 책뿐만 아니라 관련 책도 찾아 읽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언니는 전공자이거나 또 다른 관심으로 책읽기를 시작한 사람일 것이다.

책을 읽고 감상문을 자주 썼다. 예전 일이다. 이제는 그게 힘들다. 뜻도 찾고 관련 책도 읽고 관련 기사도 찾아 읽고 나면 맥이 턱 풀린다. 이웃나라 독서 모임 가운데 한 권의 책을 몇 개월 동안 읽는 방법이 있다. 꽤 흥미롭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그렇게 읽고 싶다. 문제는 그렇게 읽고 싶은 책이 몇 권 더 있다. 제 스스로 협상을 했다. 파편읽기를 해보자. 맥락을 무시하자. 좀 느슨하게 읽어 보자. 좀 친절한 읽기를 해보자.

볼 수 있는 것[가시적인 것]이 너무도 많다. 말[하기]에 종속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비중을 지닌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성적인 것이 너무도 많다. […] 너무도 많은 앎이 있다. 앎은 너무 일찍 오며, 앎은 비극적 행위가 우여곡절의 작동을 통해 점차 밝혀내야 할 것 위로 불쑥 나와 있다. 이 볼 수 있는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가 있다. 즉, 보여진 것과 보여지지 않은 것,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예측된 것과 예측되지 못한 것 사이의 좋은 관계를 보증하는 데 적합한, 또한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두기와 가까움의 관계를 조정하는 데 적합한 특정한 유형의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202-203쪽

그러나 랑시에르는 좀 불친절해야 관심이 증폭된다고 한다. 해당 글은 ‘재현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를 주장한 글 가운데 일부지만, 이것은 책읽기로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너무 쉽게 읽은 책은 의심해야한다. 사진도 그렇다. 너무 쉽게 본 것은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모든 책과 사진을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엄청 피곤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으려나. 랑시에르의 말처럼, “적합한 특정한 유형의 관심”을 이해하면 피곤함을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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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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