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19(푼크툼:부분적 특징)

Andy Warhol. 1958. © Duane Michals

아무리 순간적이라고 하여도 푼크툼은 다소간 잠재적으로 확장의 힘을 가진다. 이 힘은 흔히 환유적이다. 〔…〕 푼크툼의 또다른 확장의 예(보다 덜 프루스트적인)가 있다. 역설적인 말 같지만 그것은, ‘하찮은 것’으로 남아 있을 때, 사진을 온통 가득 채운다.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 옮김, 열화당, 1986, 48-49쪽

바르트는 푼크툼을 디테일로 여깁니다. 세세한 부분, 그러니까 사물에서 한 부분이 전체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라 합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와 같은 말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나타내는 식이죠. 바르트는 흙투성이 도로에 파여진 결에서 중부 유럽을 떠올리고 곧바로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여행할 때 지나간 마을을 떠올립니다. 사실, 떠올린다는 표현이 맞지 않습니다. 몸으로 알아챈다고 해야 할까요?

요즘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읽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아직 얼마 읽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혼란스러워요. 그 혼란함을 트위터에 적었는데 이렇습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지평(선)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잠시라도 그리기를 멈추면 엉뚱한 세계로 추락한다. 게다가 만연체이다. 물론 그리기가 잘 되는 날은 만연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보통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에 따른 책만 읽다 보니 자극에 예민한 글은 저를 어지럽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있더군요.

아마도 이런 기분이 바르트가 듀안 마이클이 촬영한 앤디 워홀 사진을 보며 느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주 볼 수 있는 초상사진은 얼굴사진을 뜻하죠. 사진 속에 워홀은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워홀은 아무것도 감추고 있지 않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끝이 넓적한 손톱의 불쾌한 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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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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