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24(취소의 말)

바르트는 앞서 “사진은 순수한 우연성이며, 오직 우연일 뿐”이라 했다. 그는 이런 우연한 사진으로부터 그 본질을 찾는 탐구를 시작했고 그 매개자로 ‘나’를 선택했다. 이것은 모든 것에 들어맞는 것이 아닌 따로따로 들어맞는 앎이다. 1장부터 시작해 23장에 이르는 글이 바로 그 탐구의 기록이다. 지금까지 그가 분류한 사진의 특성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뿐만 아니라 판단을 멈추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다. 즉,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스투디움이며 판단을 멈추는 행위는 푼크툼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나의 기쁨은 불완전한 중재인이었음을, 향락주의적인 계획으로 축소된 주관성은 보편적인 것을 알아볼 수 없음을 인정”*하며 취소의 말을 적는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이것이 정말 의미 없는 탐구였을까? 그러니까 정말 취소의 말일까?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은 바르트가 앞서 적은 글에 대한 결론이 이렇다면, 굳이 취소의 말을 책에 실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몇 장의 들어가는 말로 언급해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책 분량만 따지면 반 정도를 차지하는 말을 의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기에는 찜찜함이 남았다. 그러던 중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접했고 본질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가능하다는 얘기를 접했다. 내가 현상학에 대해 말할 정도로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현상학적 환원은 바르트가 앞서 시작한 탐구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후설은 현상학에서 대상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관계를 통해 파악한 경험적 자아를 하나로 응집해주는 선험적 자아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후설이 말하는 경험적 자아를 바르트는 스투디움이라 명명하고 있고, 선험적 자아는 푼크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푼크툼은 아직 진정한 선험적 자아라고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푼크툼을 제각각 사진에서 따로따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푼크툼이라 규정했지만, 이런 정의는 그의 말따나 보편적이라 할 수 없다. 더불어 경험적 자아를 하나로 응집해주는 것이 선험적 자아라면 푼크툼은 아직 응집된 결정체는 아니다. 후설은 선험적 자아를 알게 하는 것은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함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이제 더 깊숙이 선험적 자아를 알기 위해 취소의 말을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진의 증거, 사진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이라도 볼 수 있는, 그리고 그가 보기에 그것을 모든 다른 영상과 구별시켜 주는 이 사물을 찾아내기 위해서, 내 자신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야만 했다.”**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광희 옮김, 열화당, 1986, 61쪽
** 앞의 책,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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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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