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2016년 4월호)에 실린 <변두리 사진 보고서: 우리는 이미지로 소통할 수 있을까>를 읽고

물체는 물질로 이뤄진 사물이다. 사진은 사물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나타나도록 찍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보존된 형상을 보고 사물을 인식한다. 물론 인식 대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이며 사진에 보존된 사물은 실재 사물이 아닌 그 사물의 형상이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물질이라 한다면, 사물은 물론 사진도 물질이라 말할 수 있다. 물질은 물체를 이루는 존재이다. 고대엔 물체를 이루는 물질은 단 하나라는 설이 있었다. 이후 생각이 확장되어 물체를 이루는 물질은 하나가 아니라 네 개라는 설이 등장한다. 여기에 어떤 성질의 상호 작용에 의해 물질은 다른 물질로 변할 수 있다고 믿었다. 흔히 알고 있는 연금술의 시초다.

그러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연금술은 실패했고 물질의 기본 단위는 원자이며 그것을 이루는 원자핵와 전자의 존재도 알게 됐다. 더불어 현대 물리학에서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 단위가 아니며 쿼크와 렙톤이 물질을 이루는 기본 단위임을 증명했다. 이렇듯 물질에 대한 개념, 그러니까 물질관은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변했다.

사진도 다르지 않다. 1990년대 인터넷이 전파되고 빠르게 발달하며 물질 자체였던 사진은 조금씩, 그렇지만 빠르게 보이지 않는 인터넷 공간으로 스며들었다. 인화물을 통해 사진을 봤던 세대는 액정을 통해 사진을 볼 수 있게 됐다. 인화를 통해 결과물을 볼 수 있던 시대엔 사진 자체가 물질이었다. 이미지 기술이 걸음마 수준일 당시 사진 인화물과 액정 이미지는 분명 차이가 컸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만에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이미지 기술은 발달했다. 더불어 인터넷의 발달로 사진을 보는 방식이 변했다. 인화를 통해 볼 수 있던 사진은 인터넷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물질을 통해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떨까? 우리는 주로 언어를 사용해 소통한다. 소통이란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언어 대상은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가 돈키호테를 얘기할 때 돈키호테는 볼 수 없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돈키호테를 부르고 그에 대해 얘기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언어가 실재와 현실을 오간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사진 이미지, 그러니까 인터넷을 떠도는 디지털 이미지의 성격과 매우 흡사하다.

이러한 비물질 소통은 자동차 광고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기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지위나 개인의 기호를 나타내기 위해 자동차를 구매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동차는 물질이지만 이미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내포한 상징물이다. 특정 자동차를 보고 어떤 의미가 떠오르는 건 이런 이유이다. 결국, 이것은 기호를 말한다. 기호는 언어와 실재의 중간개념으로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일화를 통해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는 <레미제라블>을 새로 출판한 뒤 나폴레옹 3세의 제정에 반대해 영국의 한 섬에 망명했다. 새 책이 잘 팔리는지 궁금했던 위고는 출판업자에게 한 장의 전보를 띄웠다. 그 내용은 “?”였다. 이 전보를 받은 출판업자는 즉시 위고에게 회신했는데 답변 역시 한 글자였다. “!”. 책이 놀랍도록 잘 팔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백 자의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더 감동적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이모티콘은 감정을 싣기에 적절하다.

김우룡·김해영, 『비언어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107쪽.

위고의 일화는 이모티콘을 설명하기 위해 소개됐다. 위고와 출판업자가 사용한 문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호이다. 질문을 하거나 놀람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두 기호는 당시 서로의 질문과 답을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데 선택된 표현이다. 물론, 이때 중요한 전제가 있다. 즉, 위고가 띄운 전보 내용을 출판업자가 반드시 이해해야하며 출판업자가 띄운 전보도 위고가 반드시 이해해야한다는 점이다. 둘은 너무도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화다. 결국, 위고의 일화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기호란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떨어져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가능한 일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과 사진을 보는 사람이 위고와 출판업자와 같이 해당 기호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의미를 서로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가능하다. 질문과 답이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통신은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 장의 사진에는 정말 많은 것이 포함된다. 의도하지 않은 대상이 출현하고 그로 인해 온갖 말들이 들러붙는다. 내가 본 대상은 하나일지라도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엔 주변 풍경도 어쩔 수 없이 포함된다. 그렇다고 사진에 대상만 덩그러니 남겨 놓는다면, <우리는 이미지로 소통할 수 있을까>에 소개된 디카프리오의 오스카 수상 소식에 축하 메시지로 왜 ‘팽이 움짤’이 올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나의 사물 혹은 사전적 단어를 지시할 뿐이다. 결국 소통의 도구로 사진 이미지를 선택한다면 사진은 글의 힘을 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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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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