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2호: 한가로움의 은밀함

오랜만에 펼쳐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그동안 좋지 않은 일을 연달아 겪어 여유가 없었던 탓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 6월호는 포장비닐을 뜯지도 않은 채 간직하고 있었다. 삶이란 무엇일까? 살아가는 의미보다 살아가는 그 자체가 힘들다보니 원론적 질문은 다 부질없어 보였다. 수많은 학자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삶, 그 자체를 말하려 했던 것일까?

첫 지면에 소개된 “런던 예술거리의 은밀함”(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2호)에서 아트딜러인 새디 콜스는 꽤 여유로워 보인다. 그가 하는 일은 예술가와 수집가 사이의 가교 역할이다. 그가 말하는 예술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어떤 것”이다. 과연 그럴까? 힘든 시기를 계속 겪다보니 그의 말처럼 예술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불과 몇 달 전에 이 글을 읽었다면, 난 그의 말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그럴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애니메이션 《프란다스의 개》에서 네로는 루벤스의 명화를 보며 파트라슈와 함께 숨을 거둔다. 연로한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네로는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희망뿐만 아니라 생활도 어려워져 삶 자체가 송두리 채 사라진 상태였다. 과연 그에게 삶은 무엇일까? 의미가 있었을까? 루벤스의 명화를 보며 네로는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삶은 살아가는 것인데 당시 네로에게 삶은 다른 의미였을지 모른다. 아니, 삶보단 그 너머의 어떤 것을 갈구했을지 모른다.

예술은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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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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