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일: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주형일,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남대학교출판부, 2006

감상(문)을 쓸 땐 주로 옆에 책을 놓고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인용하며 생각을 정리한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엔 감상의 대상인 책이 없다. 조금 난처한 상황인데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의도이다. 과연 책을 읽고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일지, 늘 궁금했다. 적확하게 말하면 개념이다. 개념은 스스로 정립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개념을 정립한다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나보다 앞서 생각하고 정리한 선구자의 도움이 필요함은 당연하다.

지금부터 적는 글은 오로지 기억을 통해 적는 상념의 성격이다. 상념은 여러 가지 생각인데 그 생각이 내가 감상을 쓸 책에서 본 것을 통해 드러난 것인지, 다른 책에서 본 것을 통해 드러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미지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려 한다.

이미지에 대해 쓴 여러 책을 보면서 어려웠던 점은 이미지의 개념이다. 이미지는 워낙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마다 동일한 단어일지라도 다른 인상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의 주제로 선택한 단어이니 오죽하겠는가. 사람은 하나의 관점에서 대상을 분석해 대상을 이해하려 한다. 책, 논문 등등에서 용어에 대한 간략한 정리로 시작하는 이유는 다양한 의미를 하나의 의미로 정립해 혼란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이미지는 실재하는가. 이 논쟁이 상당히 기억에 남는데 대부분의 지면은 이 논쟁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실재하지 않고 부재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디지털이미지를 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흔히 디지털이미지는 인터넷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진 형태의 이미지 파일을 지칭한다. 우리는 디지털이미지를 통해 뭔가를 본다. 그리고 뭔가를 떠올린다. 만약 지각행위를 통해 얻은 정보가 미약해 이해할 수 없는 상태라면, 우리는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의식은 ‘~에 대한 의식’이다. 이미지는 과거에 보았던 혹은 겪었던 감각적 경험이 현재에 나타나는 하나의 의식이다. 이미지가 이미지화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즉 사진 형태의 이미지 파일을 보며 과거에 겪었던 감각적 경험의 한 형태인 이미지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다.

나는 현실 같지만 현실 같지 않은 사진을 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디지털이미지의 파일명은 ‘추상’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보통 이런 느낌의 사진을 추상사진이라도 부른다. 사실 실제 파일명은 영문 ‘abstract’로 시작한다. 이론적이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개념은 실재의 문제와는 무관하다. 수학에서 말하는 ‘선’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한다. 실재 수학에서 말하는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에고치에서 뽑은 비단실은 수학에서 말하는 선과 가깝다. 하지만, 우리는 비단실을 만질 수도 있고 미세하게나마 부피를 느낄 수 있다. 비단실은 면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단실이 선이라 말할 수 있으며 비단실을 나란히 놓아 면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사진을 보면 현실의 문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원수로 테두리를 만든 미로정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과거의 경험 탓인지 사진을 보자마자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하나 혹은 몇 개의 이미지가 현상된다. QR 코드로 미로를 빠져나간 사람들도 생각나고 우리를 따라오다 같이 벽을 맞대고 본 기억도 난다. 전망대에 올라 가끔 과자 포장지에 인쇄된 미로를 풀던 방식을 따라 마치 눈이 연필인 것처럼 이리저리 선을 긋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고생하며 빠져나온 길은 캄캄했던 기억도 난다.

이상하게 들릴 것 같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이 말해야겠다. 사진을 보고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도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말했고 보여주지 않았던 ‘온실사진’이다. 난 온실사진을 본 적이 없다. 바르트가 보여주지 않은 온실사진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물질적 이미지 현상이라 볼 수 있겠지만,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이미지가 떠올랐다. 내가 바르트의 책을 읽고 적던 글에 사용한 디지털이미지 때문이다. 두 사진은 형태보다는 분위기에서 비슷하다. 글에 사용한 디지털이미지는 온실의 형태였다. 두 사진의 공통점은 사람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주위는 어둡고 특정 부분만 명도가 높다. 만약 이런 이유로 온실사진이 떠올랐다면, 유사한 디지털이미지를 본다면 지속적으로 동일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까지 내가 세 장의 디지털이미지를 보면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상념을 적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사진은 문화 경험을 통한 측면에서 상징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사한 상념을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사진, 특히 마지막 사진은 너무도 개인적인 상념이라 공감하기 힘들 것 같다. 사진 형태의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문화적일 수 있고 상징적일 수 있으며 또한 개인적일 수 있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다양한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왜 보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대상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봤을까. 그리고 그 의도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것을 알면 변화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물음은 시작인데 책에서 알려준 대로 ‘기호학’을 출발점으로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 내 앞에 『기호학으로 세상 읽기』라는 책이 한 권 있다. 에세이 형식으로 기호학자들이 모여 다양한 측면에서 세상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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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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