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보고 읽고 쓰기/파편읽기 (55)

방랑: 사진은 내 기억이 아니다

그러나 방랑은 단순한 광기보다 더하다. 자취를 남기고, 시간을 붙잡는다. 늙을까 겁내고 죽을까 겁내지 않을까. 그뿐인가. 찍었던 옛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에 집착했을까? 내가 찍은 사진인데 내 기억이 아니다. 언제나 이렇게 모호하다. 사진가의 기억은 이런 것과 다를 텐데. 그건, 분명 내 사진들과 아무 상관없다. 내가 기억과 시선을 어지간히 분리했기 때문에 광기가 나타나는 것 아닐까?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나 시선..

방랑: 은염사진

화도 나고, 낙심도 하고, 기뻐 날뛰고 미친 듯 열광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순간들도 있었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가장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눈으로 가능한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다. 예외적 순간에 반하는 순간이다. 방랑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특별한 순간, 결정적 순간, 예외적 순간 같은 것이 어디 있을까? 일상의 순간들이 있을 뿐인데.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

방랑: 중력 삐에로

방랑은 마땅한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다. 늘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중간지대를 찾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뭘 하지?”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16쪽. 드파르동이 자주 찾던 아프리카, 뉴욕, 그런 익숙한 곳에서 그의 방랑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드파르동은 그것을 ‘중간지대를 찾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중간계란 무엇인가. 현실에서 중간계가 존재하는가. 중간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드파르..

방랑: 혼자, 홀로, 외로움의 반동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레몽 드파르동이 《방랑》에서 언급한 ‘중간계’, 그것이 떠오르는 글을 만났다. 그것도 글을 여는 글에서… 이 책의 필요성은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담론은 아마도 수많은 주체들에(누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의해 말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주변의 언어들로부터 버림받았다. 또는 무시되고, 헐뜯어..

방랑: 멜랑콜리한 사진

어쨌든 과민한 강박증을 채우려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다. 우리 사진가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든 뭐든 살아 있는 것들의 이야기를 포착하고 또 사진을 세상 사람들과 형상으로 차근차근 채우려 하는 것이 싫다. 이 세상이 이런저런 사람들로 넘치는 별이라며 안심시키려 하는 듯한 태도가 싫다. 왜 텅 빈 것을 그렇게 무서워할까?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9쪽. 보통 “길을 잃고 헤매다. 길을 잘못 들어서..

존재와 무: 죽음-기억, 죽음-망각

변광배의 《존재와 무》에서 궁금했던 것 중 한 가지가 ‘죽음’에 관한 것이다. 의식은 두 가지 경우에 의식이 아닌 것이 되는데, 그 첫 번째가 죽음이고 두 번째가 자기기만이다. 또한 죽음이라는 것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결정과는 대척을 이룬다. 그렇다면, 사회와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이는 삶은 어떤 의미인가. 더불어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인가. 이런 것을 고민하던 중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다.죽는다는 것은 사회..

사진과 텍스트: 미첼, 벤야민과 사진의 정치경제학

아래 글은 앞으로 김우룡 엮음, 《사진과 텍스트》(눈빛출판사, 2006)를 가지고 독서모임 후 정리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도 같은 질문이나 혹은 다른 질문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W. J. T. 미첼, 〈벤야민과 사진의 정치경제학〉 W. J. T. Mitchell, BENJAMIN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PHOTOGRAPH, 1986 REPORT W. J. T. ..

존재와 무: 내가 부재하는 동안 나를 지시하는 도구와 사물들

1 변광배의 《존재와 무》(살림, 2005)를 읽고 보니, 사르트르가 말한 자아 개념이 중요한 것 같다.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통해 생각하고 있는 행위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 여겼지만, 정작 생각하는 실체인 ‘자아’를 의심하지 못했다. 니체는 결코 우리가 진정한 자아에 다가갈 수 없음을 말하며 지속적이고 동일한 인상을 갖지 못함을 그 이유로 든다. 이제 사르트르는 “만약 의식에 의해 자기 자신이 외부에 있는 대상과 같이 포착될 수 있다면 이때 의식..

행복한책읽기: 내 안에 있는 물건과 밖에 있는 물건은 같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1992) 가운데 살펴볼 문장: 아름답다의 아름은 알음알음의 알음, 앎의 대상이다. 아는 물건 같다가 아름답다의 어원이다. 고유섭은 아름을 앎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름은 앎이 아니라 앎의 대상이다.〔50〕 ‘아는 물건 같다’라는 것이 눈에 띤다. 그것을 ‘어디서 본 것 같지만 그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는 물건 같다’로 해석한다면, 역시 아름은 앎이라기보다는 앎의 대상이 맞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관념을 통해 ..

존재와 무: 의식의 거리란 무엇일까

두 번째 독서모임에 빠져 어색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모두 인심이 넉넉하고 같이 어울리기 좋아해 금세 다시 어울렸다. 이런 모임이 얼마만인가. 대체로 사회관계는 모르고도 아는 척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무시당하지 않으려 애쓰기 쉽다. 이번 모임에서 느낀 것은 이제 나도 가면을 벗어야 하지 않나 싶다. 예전 직장에서 몇몇 부하 직원과 얘기를 나눌 때 누누이 모르면 모른다고 서로 알리고 해결점을 같이 찾자고 말했는데, 이제는 내가 반대편 입장에서 지킬 ..

행복한책읽기: 김현의 책을 읽다가 공감 가는, 책읽기라는 것에 생각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문학과지성사, 1992[1쇄]·2014[30쇄])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토록 염원하던 독서토론이 생겨 마음이 바빴습니다. 갑작스레 두 개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다니. 기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차차 익숙해지겠죠. 익숙해진다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제 성향이 익숙해지면 뭔가 또 다른 꺼리를 찾는 터라 다시 읽던 책을 찾은 거죠. 꾸준히 공부하는 책이 또 있군요. 《1900년 이후의..

사진과 텍스트: 워커 에반스가 말하는 사진에 있어 놀라움의 일시성

아래 글은 앞으로 김우룡 엮음, 《사진과 텍스트》(눈빛출판사, 2006)를 가지고 독서모임 후 정리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도 같은 질문이나 혹은 다른 질문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워커 에반스, 〈사진의 재등장〉 Walker Evans, THE REAPPEARANCE OF PHOTOGRAPHY, 1931 QUESTION 독일 사진가 프란츠 로의 책 가운데 글: “어떤 한순간의 형태에 대한 범상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