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레몽 드파르동 (9)

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방랑》 덕에 나는 내 사진을 깊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난생 처음 영화 한 편을 만들 때처럼 책 한 권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글과 사진을 적당히 뒤섞지 않고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된 책을 엮었다.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175쪽. 흔히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사용함에 있어 힘의 균형을 맞추기는 어렵다. 대체로 텍스트가 지배하는 신문, 잡지..

방랑: 파편읽기는 추락이다

드파르동은 딱 맞춤한, 그러니까 비슷하게 알맞은 것이 아니라 정확한, 즉 자세하고 확실한 이미지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방랑 작업에서 최대한 선명하게 사진을 찍었다.드파르동이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거리’에 대한 입장이다. 우리는 거리를 둠으로써 좀 더 객관적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고 말하곤 한다.‘자기 자율성’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구경꾼이 ‘이것은 이것이군’이라 정의할 수 있는 가능성..

방랑: 순수한 시선

현실은 정말이지 덧없다. 절대로 안심할 수 없다. 때때로 저녁에, 호텔방에서 잠자리에 들 때 궁금해진다. 내가 협탁에 올려놓은 두루마리필름들이 대체 뭘까? 우리 일상의 단 몇 초분에 불과한데…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66쪽. 단 몇 초의 사진, 그리고 또 다른 단 몇 초의 사진이 드파르동의 두루마리필름에 담겨 있다. 현실을 탐색하는 그는 중간계에서 세로로 세상을 바라보며 어떤 의미를 찾고 있을까?..

방랑: 주제 없음의 주제

《방랑》은 때늦은 작업이나 다름없다. 나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정신병원과 《뉴욕 통신》에서 작업했던 그런 자리로 뒤늦게 돌아온 것이다. 분명 그렇게 했다. 나는 주제도 제목도 팽개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만족했다. 방랑이란, 주제를 포기하는 것이고 영화에서처럼 줄거리를 짤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줄거리라는 것은 항상 영화를 감시하고, 이야기를 감시하는 귀찮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고 보면 결국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레몽 드파르동...

방랑: 사진은 내 기억이 아니다

그러나 방랑은 단순한 광기보다 더하다. 자취를 남기고, 시간을 붙잡는다. 늙을까 겁내고 죽을까 겁내지 않을까. 그뿐인가. 찍었던 옛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만 가는 시간에 집착했을까? 내가 찍은 사진인데 내 기억이 아니다. 언제나 이렇게 모호하다. 사진가의 기억은 이런 것과 다를 텐데. 그건, 분명 내 사진들과 아무 상관없다. 내가 기억과 시선을 어지간히 분리했기 때문에 광기가 나타나는 것 아닐까?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다. 누구나 시선..

방랑: 은염사진

화도 나고, 낙심도 하고, 기뻐 날뛰고 미친 듯 열광하기도 했지만, 평범한 순간들도 있었다. 아무 일도 벌이지 않고, 가장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눈으로 가능한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다. 예외적 순간에 반하는 순간이다. 방랑도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특별한 순간, 결정적 순간, 예외적 순간 같은 것이 어디 있을까? 일상의 순간들이 있을 뿐인데.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

방랑: 중력 삐에로

방랑은 마땅한 곳을 찾아다니는 일이다. 늘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중간지대를 찾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뭘 하지?”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16쪽. 드파르동이 자주 찾던 아프리카, 뉴욕, 그런 익숙한 곳에서 그의 방랑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드파르동은 그것을 ‘중간지대를 찾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중간계란 무엇인가. 현실에서 중간계가 존재하는가. 중간이라는 것은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드파르..

방랑: 혼자, 홀로, 외로움의 반동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레몽 드파르동이 《방랑》에서 언급한 ‘중간계’, 그것이 떠오르는 글을 만났다. 그것도 글을 여는 글에서… 이 책의 필요성은 오늘날 사랑의 담론이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담론은 아마도 수많은 주체들에(누가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의해 말해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보호받지는 못했다. 그것은 주변의 언어들로부터 버림받았다. 또는 무시되고, 헐뜯어..

방랑: 멜랑콜리한 사진

어쨌든 과민한 강박증을 채우려고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다. 우리 사진가들이, 살아 있는 사람이든 뭐든 살아 있는 것들의 이야기를 포착하고 또 사진을 세상 사람들과 형상으로 차근차근 채우려 하는 것이 싫다. 이 세상이 이런저런 사람들로 넘치는 별이라며 안심시키려 하는 듯한 태도가 싫다. 왜 텅 빈 것을 그렇게 무서워할까?레몽 드파르동. 《방랑 ERRANCE》. 정진국 옮김. 포토넷. 2015. 9쪽. 보통 “길을 잃고 헤매다. 길을 잘못 들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