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와 장 모르: 『말하기의 다른 방법』, 반(半)언어로서의 사진의 의미

존 버거·장 모르, 이희재 옮김, 『말하기의 다른 방법』, 눈빛출판사, 2004

존 버거와 장 모르의 사진에 관한 것

존 버거와 장 모르의 『말하기의 다른 방법』(1982) 서문에는 이 책이 어떤 의미로 제작되었는지에 대해 잘 말하고 있다.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산악지방에 사는 농부들의 생활을 담은 사진집에 대한 것이다. 두 번째는 사진에 관한 것이다. 즉, 오늘 날에 만연한 사진이라는 것의 의미와 활용에 대해 답을 찾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목적에 대해 관심이 있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첫 번째 목적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총 5부 중 2부의 에세이는 존 버거의 다른 책, 『보는 방법』(1972)의 연장선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두 번째 목적에 부합되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럼에도 먼저 장 모르가 직접 체험한 세 편의 글은 가슴에 와 닿는다.

장 모르, 「내 카메라 너머에」

동물 흉내를 낸 이방인

장 모르, 「내 카메라 너머에」

왠지 모르게 나는 소녀를 향해 강아지처럼 멍멍 짖었다. 소녀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런 다음 나는 야옹야옹 고양이 울음소리를 냈다. 모기장 뒤의 소녀의 표정은 나의 연기를 알아차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놀이를 계속하면서 카메라를 집어 들고 사진을 찍었다. / 소녀는 이 사진들을 영영 못 볼 것이다. 소녀에게 나는 동물 흉내를 낸 수수께끼 이방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내 카메라 너머에」, 15쪽.

나무꾼의 액자사진

장 모르, 「내 카메라 너머에」

어느 날 한 나무꾼의 아내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제 남편 사진을 한 장 찍어 주시겠어요? 혹시 남편이 숲에서 일하다 죽어도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사진이 한 장도 없어서요.’ […] ‘내가 나무 자르는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꿈꾸어 오던 사진이오.’ ― 「내 카메라 너머에」, 61-69쪽.

사진 찍을 수 없는 것

몇 해 전 나는 알프스 원정에 나섰다. 그랑조라스 남벽을 오를 생각이었다. 가장 쉬운 코스였다. 우리가 밤을 보내기로 한 산장에 당도하니, 방금 북벽에서 내려온 다른 원정대가 와 있었다. 정상을 불과 몇 미터 남기고 발이 묶여 밤새 폭풍설에 시달렸다고 한다. 몇 사람은 지독한 동상에 걸려 있었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탓으로 하나같이 초췌해 있었다.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될 수 있는 특종 사진이 내 눈앞에 있었다. / 그러나 나는 카메라를 꺼내지조차 않았다. 부도덕한 일이었다. 부상자를 등에 업고 후송하는 일이 더 급했다(당시엔 헬리콥터가 없었다). ― 「내 카메라 너머에」, 80쪽.

양쪽 입장 모두에 설 수 없다면 찍을 수 없다

장 모르의 담백한 글과 진정성 있는 사진을 보면서 글과 사진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사진을 촬영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글이 없었다면 유사성은 존재할 수 없다. 사진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극히 일부이다. 어떤 사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허리 수술을 받은 장 모르가 사진을 찍는 자의 입장이 아닌 사진에 찍히는 자의 입장에 섰을 때 겪는 갈등은 고개가 끄덕여질 뿐만 아니라 심연을 울린다. 사진으로 이 고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장 모르 자신이 양쪽의 입장 모두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필름이 아니라 나의 기억 속에 그 체험을 뚜렷이 새기기 위해.” 그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반(半)언어로서의 사진

바라보는 사람은 의미의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의미는 그 사람을 넘어서는 수도 있다. 이러한 ‘넘어섬’은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이다. 계시는 종교적인 범주로 쓰이기 전에 원래 시각 범주에 속하는 말이었다. 계시에 대한 희망 ― 주지하듯이 어린 시절엔 특히 그런데 ― 은 어떤 뚜렷한 목적은 없어도 무엇인가를 바라보고자 하는 그 숱한 ‘의지’를 낳는다. / 이 관계의 전체상은 모습이 반(半)언어를 구성한다는 말로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을 듯싶다. 완전한 언어와의 유사성과 상이성을 동시에 시사하는 이런 표현은 서투르고 부정확하지만 적어도 몇 가지의 관념들을 위한 공간은 열어 둔다. ― 「모습들」, 113-114쪽.

사진의 의미에 대해 존 버거는 ‘반(半)언어’라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시공간적으로 사진은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의 일면을 싹둑 잘라 낸다. 그림과는 다르게 사진은 우리 삶의 일부분을 이런 방식을 통해 인용되고 사진의 모호함은 찍히는 시간과 바라보는 시간의 불일치로 발생함을 존 버거는 말한다.

우리는 사진에 드러난 정보를 통해 무언가를 알 수 있다. 다만, 그 정보의 응집성이 중요하다. 싹둑 잘려지는 순간, 담겨진 정보의 응집성에 따라 하나의 단면은 바라보는 자와 상호 작용하여 확대될 수 있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가 사진은 ‘기호 없는 메시지’라고 말하며 홀연한 깨달음을 뜻하는 ‘사토리’를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체적으로 사진은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사건을 읽을 수 있다. 존 버거가 말하는 ‘반(半)언어’인 사진과 ‘계시’는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기호 없는 메시지’와 ‘사토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지 맵

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보고 읽고 쓰기/감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6개 입니다.

      • 반어법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네요...

        저도 이번 주에 2권의 사진집을 샀는데.. 천천히 읽어야겠어요.. ㅎ

      • 제목에 한문 글자를 하나 넣었습니다. 글 내용에는 적었는데 정작 제목에는 넣지 않았더군요. '반(半)언어로서의 사진의 의미'라고 말이죠. 사진은 자체적으로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또 다른 언어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 같았습니다. ^^

      • 안녕하세요. 네이버 메인 캐스트에 소개된 링크를 타고 왔습니다.
        저는 현재 부산에서 사진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도움이 될 글들이 많은것 같아서 글을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태임님.^^

        정리되지 않은 글이 우연히 노출되어서 혼란을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만, 이렇게 말씀을 적어주시기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사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사진을 촬영하기 보다는 사진을 읽는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을 혼자하다보니 부족함을 느껴서 인천 헌책방거리로 알려져 있는 곳에 있는 '사진공간 배다리'에서 그 앎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진을 공부하고 계신다니 반갑습니다. 서로 궁금한 점은 물어보면서 같이 배워보면 좋을 것 같아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