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뭔가 있어 보이는 ‘모던’은 참 ‘냄새’나는 말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뭔가 있어 보이는 ‘모던’은 참 ‘냄새’나는 말

다음 날이고, 책을 펼쳤지만, 역시나 같은 쪽입니다. (진도가 참 안 나간다는 것이 이런 것!) 어쨌거나 오늘은 그림이라도 있어 다행이라 여깁니다. 예술사회사의 모델과 개념 중 자율성에 대한 이야기인데, 자율성이라는 것이 모더니즘에 대한 이야기군요.

제목이 참 중요하죠. 어제 작성한 글 제목이 너무 딱딱한 것 같아 좀 펑키 제목으로 시작합니다. 그림과 인용할 글이 따로 놀겠지만, 어찌 보면 같은 얘기입니다.

모더니즘의 자율성 미학은 사회적이고 주체적인 영역을 구성했고, 이 영역에서 이루어진 부정과 거부의 예술 행위는 모든 타산적인 활동 및 도구화된 경험의 형식에 반대하며 자신의 의사를 뚜렷이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 행위는 보편 법칙의 극단적 예외에 해당한다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정반대 의도로 이용됐으며 총체적 도구화의 체제를 승인하게 됐다. 즉 자율성의 미학은 자유로운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도구화되지 않은 경험을 고도로 도구화한 형식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이 성립한다.〔23〕

말이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중요하다 싶은 곳을 진하게 표시했습니다. 그걸 이어 읽으면, “모더니즘의 자율성 미학은 정반대 의도로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도구화한 형식”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라도 이렇게 쓰면 악덕이고 저렇게 쓰면 미덕이 됩니다. 대중이 늘 미덕이고 부르주아가 늘 악덕일 수 없겠죠. 자율성이라는 초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어떤 고정되고 일률적인 방법을 탈피하는 것이 자율성이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당시 (그러니까 19세기 말) 부르주아는 귀족과 종교의 헤게모니(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권력)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문화 영역에서 발발한 자율성이 거기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죠.

문제는 “자율성 개념은 부르주아 합리성의 도구적 논리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또 풀어 보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술 작품이라는 것이 귀족이나 종교 영역에 꽁꽁 숨어 있었고 대중은 볼 기회도 없었지만, 거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숭배하게 된다는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이게 억압이 풀린 거죠. 그런데 대중화에 부르주아가 개입된 것입니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등장하게 됩니다. 벤야민의 글 가운데 읽었던 것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군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한 것이 이 책에서도 언급됩니다. 그러니까 “제의가치(cult-value)에서 전시가치(exhibition-value)로의 역사적 이행”, 즉 아우라의 붕괴죠. 무슨 말일까요. 다시 앞서 언급된 말과 섞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더니즘으로 문화 영역 내에서 억압이 풀리고 부르주아가 자율성이라는 이름하에 예술 작품을 상품화한 것이겠죠. 역설(잘못된 말이지만, 곰곰이 읽으면 잘못되지 않은 말)적이게도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 독립성과 자율성은 상품 구조에서만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존 하트필드, 만세, 버터가 바닥났군!, 포토몽타주, 38x27cm, 1935

정리하다보니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를 빼먹었군요. 흐름이라는 것이 있어서 끊기 힘듭니다. 하트필드의 작품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만세, 버터가 바닥났군!” 버터는 생필품인데 그것이 없어졌으니 뭘 먹고 살아야할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전거를 분해해서 먹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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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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