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진과 다큐멘터리 양식

사진을 대신해 그 어떤 도덕적 주장을 내놓는다고 해도, 결국 사진은 이 세계를 백화점이나 벽 없는 미술관으로 뒤바꿔 놓았다. 이런 세계에서는 모든 피사체가 소비품으로 격하되고, 미적 논평의 대상으로 격상된다. 이제 사람들은 카메라를 통해서 현실을, 그도 아니면 현실들을 구매하거나 구경한다.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이재원 옮김. 이후. 2005. 8쪽.

수전 손택의 글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물론, 틈틈이 말이죠. 2013년 말에 《사진에 관하여》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관련해서 몇 개의 글도 적었고요. 일 년이 조금 넘은 시기에 다시 책을 들춰 보는 이유는 역시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때문입니다. 차근차근 책을 읽다보니 그동안 읽었던 여러 책이 떠오르고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글은 참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계 복제 시대에 상실된 아우라를 사진 매체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앙드레 말로”를 며칠 전에 적었었죠. 손택의 글을 읽다보니 말로와 관련된 문구, 그러니까 벽 없는 미술관이 있어 인용해 놓고 생각해 봤습니다. 말로는 사진 매체를 이용해 어디에서나 마치 진품과 같은 작품을 볼 수 있게 미술책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현실과 허구의 간극을 수많은 낱말로 촘촘히 채워 넣었습니다.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현실을 구경하기 위해 허구와 낱말을 구매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드는 생각은 사진을 허구로 인정한다면 이제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싶기도 하고, 오늘 《1900년 이후의 미술사》에서 살펴 본 워커 에번스가 말한 “다큐멘터리 양식”, 그러니까 실용성을 갖는 다큐멘터리는 결코 아니라는 것으로 사진을 바라보면 허구와 다큐멘터리 양식은 같은 의미일까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생각을 좀 달리해서 사진이 허구라는 시작점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사진은 투명해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하면, 다큐멘터리 양식은 작가 의식이 표현된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둘 사이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가 현실이라면, 후자는 허상이 되어버립니다. 작가의 의식은 현실 세계가 아니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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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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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10개 입니다.

      • 작가의 의지가 투영된 사진을 통해서 (작가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 고민에 대해 글을 적어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저도 이제는 왜 의지가 투영된 것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 까지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이라면... 멋지겠죠.

      • 아마도 모피우스 님의 말씀은, 보이는 것은 시각적인 의미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서 전달되거나 느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말씀, 고맙습니다. ^^

      • 역사적 증언 가치랄까요, 맥루한도 신문의 기사보다는 거기에 실린 광고가 더 큰 고고학적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 아카이브 사진이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 그러니까 작가보다는 유형에 따라 사진이 분류되고 시대 특성을 읽을 수 있게 기록되는 점에서 말이죠. 조금 다른 얘기지만, 루이스 하인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아동 학대, 하인은 노예라고 말했습니다만, 증거로써 사진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했죠. 하인은 잡지나 신문에 실리는 삽화 개념의 사진이 그런 증거로써 기능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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