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이후의 미술사: 에드 루샤가 말하는 의미 없는 잉여존재 세계
이전 같은 분류 글에서 앤디 워홀은 자신의 반복 효과를 “계속해서 몇 번이고 끔찍한 그림들을 보게 되면, 그 그림은 실제로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1900년 이후의 미술사』, 세미콜론, 2012, 534쪽)고 말했는데, 에드 루샤(Ed Ruscha, 1937-)의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이나 『26개의 주유소』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워홀의 반복 효과로 우울함을 느꼈다면, 루샤의 사진도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왜 이런 감정이 생길까요. 게다가 워홀와 같이 정확히 똑같은 반복이 아님에도 말이죠. 루샤의 사진이 정확히 똑같지 않지만 유형적으로 같은 틀에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늘 보던 그 풍경이라 말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에드 루샤, 『선셋 대로의 모든 건물』, 1966년
에드 루샤, 『26개의 주유소』, 1963년
책에서는 루샤의 작업을 “엔트로피에 대한 실천적인 안내서”라고 설명합니다. ‘엔트로피’를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라 한다면 잉여존재, 그러니까 그냥 있는 것이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유사할 것 같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작품은 ‘의미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의미 없는 작업을 했을까요. 그런 작업이라면 우리가 그의 작업에 부여하는 의미는 참 의미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진을 보면 우울하면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비슷한 건물과 비슷한 주유소는 개성보다는 확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의 한 일면을 보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저마다 차이를 갖고 산다고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차이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단지, 보이지 않은 곳으로 숨어 있을 뿐입니다. 사는 곳, 그러니까 내부를 들여다보면, 저마다 개성이 돋보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면밀히 들여다보면 대량생산된 제품이 가득하겠지만 말이죠. 더불어 외부는 루샤의 사진으로 볼 때 차이를 발견하기 쉽지 않군요. 책에서는 이런 의미 없는 세계를 고민할 수 있는 사진이 루샤의 작업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손택이 말하는 무의미하다는 것의 의미
예술작품은 몰입하는 이에게 총체적이거나 절대적인 권리를 행사한다. 진리의 보조역이 되려는 것이 예술의 목적은 아니다. 특정 시기에 국한되는 진리이든 영원한 진리이든. 로브-그리예가 썼듯이, ―예술을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술은 모든 것이다. 예술은 자기 완결적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입장은 쉽사리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우리가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창조하고 향유하는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자율성(아무것도 ―의미하지―않을 자유)을 옹호하고자 내가 지금까지 펼쳐온 주장은 예술의 효과나 영향 혹은 기능을 배제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술작품이 지닌 예술작품으로서의 기능을 인정하고 나면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뿐이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이후, 2002, 55쪽
우연히 조윤경의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를 읽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그 책을 찾은 것은 맞다.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보는’ 것과 ‘읽는’ 것에 대한 책이다. 한 지인 때문에 다시금 책을 읽기 시작했고 우연은 아니지만 우연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의미 없음’의 다르지만 같은 말을 찾았다. 이것은 ‘의미 없음’ 혹은 ‘무의미’의 반복이다.
사실 우리는 언어유희라고 하면 흔히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치부하기 쉽다. ‘무의미한 말장난’인 것은 맞지만, 이때의 ‘무의미’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의미를 비워 얼마든지 새로운 의미를 채워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무엇보다 언어유희는 즐겁다. 사회적인 약속으로서의 언어 이전에, 언어가 스스로 다른 언어를 낳는 원초적인 창조의 근원을 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조윤경,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그린비, 2012, 50쪽
어제에 이어 동일한 책에서 다시 인용한다. 아래 인용한 글은 마치 샤르트르가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작가의 정의를 말하는 듯하다.
그(에드워드 루샤: 인용자 주)는 『26개의 주유소』를 통해 사진첩 형태의 새로운 책을 보여준다. 뒤샹의 「녹색 상자」와 더불어 북아트의 효시가 된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이 독특한 책은 48페이지에 걸쳐 그가 살고 있는 로스앤젤레스와 그가 자라난 오클라호마시티 사이에 있는 26개의 주유소 사진으로 구성된다. 사진에는 텍스트가 동반되지 않으며 비순차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작가 자신이 “내 사진들은 흥미라든가 주제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사실들’의 수집일 뿐이다. 내 책은 ‘레디메이드’를 수집한 것과 같다”(고드프리, 『개념미술』, 99쪽에서 재인용)라고 말한 의도를 입증해 준다. 특별한 감정도 개입되어 있지 않고, 작가의 시점도 드러나지 않는 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 그는 위에 인용한 글에서 책의 개념을 뒤샹의 ‘레디메이드’ 개념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뒤샹의 레디메이드의 핵심은 기성품을 작가가 ‘선택’하여 여기에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행위에 있다. 이에 따르면 루샤의 책에서는 작가와 독자, 책의 역할이 새롭게 부여된다. 작가는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자, 새로운 책을 쓰는 자가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을 선택하는 자, 여기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자이며, 독자는 완성된 책을 수동적으로 읽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독서의 방식을 결정하고 책에 순서를 부여하며 책을 완성하는 사람이 된다.
또한 책은 이 둘 사이의 적극적인 소통을 매개하는 매체로 기능한다. 따라서 루샤의 책은 열린 텍스트들의 집합이며, 언제든 변화 가능하고 무수한 이야기의 조합들이 만들어지는 생성 그 상태로 남아 있게 됨으로써, 인터넷이 생성한 텍스트인 하이퍼텍스트를 떠올리게 한다.
조윤경, 『보는 텍스트, 읽는 이미지』, 그린비, 2012, 175-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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