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텍스트: 미첼, 벤야민과 사진의 정치경제학

아래 글은 앞으로 김우룡 엮음, 《사진과 텍스트》(눈빛출판사, 2006)를 가지고 독서모임 후 정리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도 같은 질문이나 혹은 다른 질문이 있다면, 적어주세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W. J. T. 미첼, 〈벤야민과 사진의 정치경제학〉

W. J. T. Mitchell, BENJAMIN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PHOTOGRAPH, 1986

REPORT

W. J. T. 미첼은 마르크스와 벤야민을 서로 언급하며 변증법 방법론을 통해 사진의 이중성을 검토하고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을 설명하고 있다. 궁극에는 왜 벤야민이 예술과 비예술(단순한 기술), 이 두 맹목성 사이에서 예술이라는 것이 득세할 수 있었는지를 하나의 가정을 통해 벤야민이 말한 사진이 갖는 혁명적 성격을 부정한다.

먼저 미첼은 마르크스가 사진을 언급했음을 말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문학과 예술이 사회선전에 이용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사진과 같이 최대한 생생하게 묘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생생함은 사진의 광학적 성격과는 구별된다. 즉, 기존 회화에서 인물을 신격화하는 방식인 머리 위에서 빛나는 원을 제거하고 생생함으로 그 아우라를 대체한다는 의미이다. 미첼은 비록 마르크스가 사진에 관해 불분명하게 언급했지만, 자신이 보기에 사진이야말로 물화와 역사화를 포착했다는 사실에 대한 보증이었다.

마르크스와 벤야민은 사진을 생산하는 카메라가 가진 이중성에 주목했다. 생생함과 기계복제를 통해 아우라를 벗겨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계급 없는 사회와 평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카메라는 소비적인 자본주의 정치경제학의 한 형태로 본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사진이 예술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을 모두 우상숭배로 비난한다. 어떤 결론이 도출되던 두 논쟁의 반대편에는 신격화가 꽈리를 틀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벤야민은 두 논쟁 가운데 예술이 득세한 이유를 나다르 사진에 있는 파괴되지 않고 남아 있는 아우라와 앗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아우라의 파괴, 즉 초현실주의 사진에서 벤야민이 보게 되는 ‘건강한 소외’ 현상을 사진이 순수예술로 도출되는 답이라 생각했다. 즉, 역사적으로 초창기 사진이 어두운 명암과 둥근 테두리로 아우라를 유지하고 있고 이후 기계복제술과 조명으로 그것을 떨쳐버린다는 점에서 두 사건 이후에는 혁명적 사건이 발발할 수 있는 전조로 생각했다.

그러나 미첼은 벤야민과는 달리 사진이 예술로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전통적 미학 개념이라 말한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이 등장하는데, 벤야민의 말처럼 사진이 혁명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전통적 미학 개념에 대해 저항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기술로 치부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미학 개념을 그대로 답습한 사진에 어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으로 보이는데, 그런 논의는 다음에 소개되는 존 버거와 빅터 버긴의 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 주기적으로 매주 만남이 어려워 세 주가 지나서야 모임을 가졌다. 아무래도 초기 성격과는 달리 발제 위주로 하고 서로 궁금한 점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변경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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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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