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기호들: 의미의 내파

질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알 것 같으면서도 쉽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 걸맞은 영화의 한 장면이 있다. 제목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꽤 오래된 영화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주인공은 황당한 세계와 맞닥트린다. 바로 기존에 알고 있는 언어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세계이다. 예를 들어, 기억이 틀리지만, ‘당근’이라는 낱말은 긴 원추형으로 적황색이며 맛이 달콤하고 향기가 있는 것인데 달라진 세계에서는 ‘전화기’를 뜻한다. 당황한 주인공은 아이가 보는 낱말 사전을 보며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

어제 모임에서 나온 얘기도 이와 어울릴만하다. “지성의 관념들은 그 관념들의 명시적인 의미, 즉 규약적인 의미를 통해서만 유효”하며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41쪽〕라고 한다. 결국 의미의 내파이다. 그렇다면 의미의 내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연히 마주친 기호가 해석하라고 강요하는 그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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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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