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밝은 방, 세 개의 방

롤랑 바르트: 밝은 방, 세 개의 방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인간의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대상이 되는 인간 혹은 사물에 대한 지각, 욕망, 이해 등의 의존적 방식으로 존재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는 이런 인간의 의식을 대자라고 하며 의식 밖에 있는 것,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즉자라고 한다.

카메라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간의 의식 밖에 있다. 그것을 침범할 수 없고 그것은 욕구가 없다. 그러므로 '즉자'를 뜻한다. 바르트가 말한 유령 즉, 사진 찍히는 자는 의식을 가진 대자 존재이다. 결국, 인간의 의식 밖에 있는 카메라가 우연히 나를 찍는다. 하지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손 즉, 촬영자의 존재가 엄연히 존재한다.

우연히 존재하는 카메라와 사진 찍히는 자는 즉자와 대자 관계에서 촬영자의 개입으로 대자와 대자 관계가 성립되고 마침내 서로의 존재에 대해 영향을 끼치게 된다. 침범할 가능성이 있고 욕구가 있는 대자적 존재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며 고통을 지속하고 나누게 된다.

구경꾼은 신문, 책, 앨범, 기록물에서 사진 컬렉션을 열람하는 우리 모두이다. 사진이 찍히는 사람 혹은 사물은 과녁이고, 지시대상이며, 일종의 작은 모사물이고, 대상이 발산하는 환영적 이미지인데, 나는 이것을 사진의 유령(spectrum)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위의 책, 22쪽.

내 앞에 카메라가 있다. 물론, 누군가 카메라를 들고 있을 것이고 셔터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상태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이 의식하는 것은 무엇일까? 좀 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얘기해 본다면, '여기를 보세요.'라고 촬영자가 외치는 순간 당신의 몸을 경직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촬영 전 이런 흔한 말 대신 촬영하는 순간을 알수 없도록 해 그 어색함을 감춘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당신이 인식하기도 전에 말이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어색함이 생겨났다. 카메라가 자신을 흘겨 보는 듯한 착각에도 몸은 경직되고 만다.

카메라라는 것은 이토록 우리를 경직하게 한다. 의식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카메라 앞에서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 존재한다. 사물의 인식에 서투른 어린아이는 이런 어색함에서 제외된다. 문명화된 흔한 포즈를 요구 혹은 강요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사진의 본질을 찾기 위해 시도했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이런 것이었다. '사진 찍히는 자(유령)'의 입장에서 사진을 살펴보니 카메라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경직되고 고통스러웠고 인화된 사진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포즈를 취하는 고통과 사진에 찍힌 내 모습에 대한 기대 반, 두려움 반, 인내의 시간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것을 인식하고 있기에 카메라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불안이 엄습한다. 이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애써 웃음을 짓지만 결국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야!'라고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평온하게 카메라를 의식할 수 있을까?

이번엔 다른 상황을 살펴보자. 어느 그림대회에서 일어난 일을 취재한 기자의 시선으로 소개된 이야기이다. 취재를 위해 행사장에 도착한 기자는 난감했다. 벌써 대부분의 아이가 그림을 끝내 초조함이 밀려왔다. 다행히 아직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 카메라로 아이를 촬영하려는 순간, 그 아이는 멈춰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카메라를 의식해 '얼음땡'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기자가 '땡'을 알리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상황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다음에 일어났다. 옆에서 놀던 다른 아이가 멈춘 아이의 그림을 보고 얘기하는 순간, 그 동안 죽은 듯 멈췄던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의도하지 않게 시작된 '얼음땡' 놀이는 프로이트의 자아 방어기재 중 하나인 퇴행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자신을 침범한 카메라로 경직된 고통스러운 시간, 문명화된 포즈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으며 마감 시간이 되어가니 초조하기도 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아이의 의미 없는 말이 아마도 방아쇠가 된 듯하다.

'사진 찍히는 자'의 입장에서 사진의 본질은 지속되는 고통에서 탈출 혹은 해방으로 정립된다. 하지만 사진을 보는 타인은 그렇지 않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자신을 촬영한 사진에서 초상의 슬픔 즉, 죽음을 인식했지만 비방 책자의 표지에서 만난 이미지는 내면을 상실한 험상궂은 얼굴만 드러나 있었다.

이제 사진을 보는 타인 즉, '구경꾼'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에 앞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구경꾼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입각한다면 '대자'일까? '즉자'일까? 그것의 의식 존재에 대한 여부를 떠나 다른 존재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따진다면 대자이다. 구경꾼은 어떤 것을 바라보는 즉, 그 자체로 있는 존재가 아닌 바라볼 무엇인가가 존재할 때 존재할 수 있다.

바르트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며 잘 알려진 '스투디움''푼크툼'이라는 용어를 언급한다. 스투디움은 예의상의 관심,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즉, 교양적 관심 영역이다. 동일한 종류의 광경에서 느껴지는 막연하고 동요 없고 무책임한 관심이다.

그것들은 정보를 주고, 재현하며, 현장에서 포착하고(surprendre), 의미를 띠게 하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구경꾼인 나는 다소간 즐겁게 그것들을 인정한다. 나는 그것들 속에 나의 스투디움(이것은 나의 즐김이나 고통이 결코 아니다)을 투자한다.

위의 책, 44쪽.

스투디움 영역 속에 품크툼도 공존한다. 푼크툼은 이런 교양적 관심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폭발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정의할 수 없음에 관심이 생겼고 차츰 수그러들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순간 떠올라 그 정체에 대해 알지도 모를 그런 것이다.

하나의 세부 요소(뇌관)에 연결된 폭발은 텍스트나 사진의 창유리에 작은 별을 만든다. 하이쿠도 사진도 '꿈꾸게' 하지 않는다.

위의 책, 68쪽.

바르트는 일본 서정 단시, 하이쿠를 사진과 비교하면서 좀 더 푼크툼의 세부적 요소로 파고 든다. 절제된 욕망 속에서 탄생한 살아 숨 쉬는 하이쿠나 사진 속에서 품크툼은 환하게 번지는 한 줄기 빛과 같이 빛나게 된다. 시선이 현실이라면 그곳에 존재했던 응시는 해방이다.

하이쿠도 사진도 '꿈꾸게' 하지 않는다. '꿈'은 의식되지 않은 것의 욕구 충족일 뿐이다. 그곳에 존재했던 것을 단지 시선만으로 촬영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응시하고 읽어야 한다. 하이진,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잠시 인용해 본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소리".

보통 우리는 사물들이 '진실하다'고 표명하기 전에 그것들을 확신해 버리기 때문에 역설적인 순서에 따라, 강렬함의 경험인 새로운 경험의 효과를 통해서 나는 이미지의 진실로부터 그 기원의 현실을 끌어냈던 것이다. 나는 진실과 현실을 하나의 유일한 감동 속에 뒤섞어 버렸으며, 그 속에 이제부터 사진의 본성을 위치시켰다.

위의 책, 99쪽.

과연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어떻게 타협을 본 것일까?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그곳에 존재했다', '사물이 거기 있었다'라는 바르트의 시선이 사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변할 수 없는 불가능성 때문에 과거는 사실의 상태로 인식된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면 대자적 존재이지만 불가능성은 즉자적 존재이다. 사물은 거기 있었고 작가 또한 그곳에 존재했다. 이것은 진실이며 사실이다. 결국 과거는 사물과 같이 침범할 수 없으며 지속되고 결국 즉자가 된다. 담론을 통한 지시대상은 '꿈'일 뿐이다. 하지만 사진이 지시하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현실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가 시선이 아닌 응시한 사진의 본질은 즉자적 존재였던 그것이 대자적 존재로 인식될 때 드러난다. 보는 사물이 아닌 하나의 존재로 인식될 때 아니뮬라(animula, 영혼, 마음을 뜻하는 라틴어)로 이끌어진다. '분위기'라고 규정한 사진의 본질은 어떠한 '위세'도 제거된 채 표현되고 생생하게 부활한다.

미친 것인가 현명한 것인가? 사진은 전자일 수도 있고 후자일 수도 있다. 사진의 사실주의가 미학적, 경험적 습관(미용실이나 치과에서 잡지들을 뒤적이는 것)을 통해 완화되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다면 현명하다. 이 사실주의가 사랑의 두려운 의식에 시간이라는 글자를 되돌아오게 하면서 절대적이고, 말하자면 본원적이 된다면 미친 것이다. 사물의 흐름을 뒤바꾸고 내가 결국 사진적 황홀함이라 부르고자 하는 본질적으로 유도적인 움직임인 그 시간을.

위의 책, 146쪽.

바르트의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자신을 모든 사진의 매개자로 간주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쾌락 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사진을 탐구했다. 결론적으로 사진의 광경을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진 안에서 현실의 깨어남과 투쟁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을 남겨 놓는다.

문명화된 코드에 종속되어 대상은 '그곳에 존재했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지각하는 의식을 정립할지, 상상하는 의식을 통해 대상을 부정하고 현실을 일탈할지는 우리의 몫이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잉여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도망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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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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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전에 <밝은 방>을 읽고 정리해 본 글입니다. 롤랑 바르트의 이 책을 읽고나서 추가적으로 구매했던 책이 장폴 사르트르의 <상상계>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죠. 바르트가 <밝은 방>을 쓰면서 장폴 사르트르의 <상상계>를 언급했으니, 어떤 점에서 그랬는지 궁금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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