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와 이미지

누차 언급했지만, 내가 장 폴 사르트르의 『상상계』를 읽게 된 계기는 명확했다. 나는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동문선, 2006)에서 언급한 '온실사진'의 의미가 궁금했다. 일반적으로 그 의미는 존재에 대한 단순한 인식, 즉 '그곳에-존재-했었음'으로 해석된다.

지시대상과 우연적 또는 실존적으로 연결된 기호를 말하는 지표(index)는 사진의 본질로 인식된다. 이런 의미에서 회화는 도상(icon), 즉 지시대상과 닮음의 관계에 있다. 디지털카메라의 보급(1990년대)으로 사진의 지표성이 무너졌지만,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온실사진은 아직 순수한 사진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실재의 대상과 이미지로서의 대상을 가르는 놀라운 차이라는 사실로부터, 감정의 환원 불가능한 두 부류를 구별할 수 있다. 즉 진짜 감정과 상상의 감정이다. 후자의 감정은 그 자체가 비실재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언제나 비실재적 대상들 앞에서만 나타나며 이 감정을 곧 도망치게 하려면 실재가 출현하기만 하면 된다. 마치 태양이 어둠의 그림자들을 물러나게 하듯이 말이다. 이 감정들의 본질은 강등되고, 빈곤하고, 단속적이고, 발작적이고 도식적이며, 그것이 존재하려면 비-존재를 필요로 한다.

장 폴 사르트르, 『상상계』, 윤정임 옮김, 기파랑, 2010, 264쪽

1975년, 코닥은 최초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했다. 이후 1990년대의 인터넷 보급과 디지털 이미지의 파급으로 사진의 지표성은 상실되었지만, 가상의 지표성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민음사, 2001)에서 가상의 지표성을 시뮬라크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다시 온실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 그 사진은 실재의 대상이자 이미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바르트가 어린 소녀를 과거, 그곳에서 보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이다. 사진 속 소녀는 이미지의 대상이다.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상상의 감정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바르트가 온실사진 속 소녀가 어머니라고 인식한 것은 누군가 그 소녀가 어머니라고 말을 해줬기 때문이리라. 알려준 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바르트는 그것을 믿었고 그 소녀는 어머니로 인식되었다. 실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순간이 아닐까? 물론, 지금 사유에서는 가상의 지표성을 담은 실재의 대상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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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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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댓글입니다

      • 오, 전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를 읽을 참입니다. 하하, 묘한 감동입니다. 아직 용동 충전이 되질 않아서 박평중 선생님 책은 조금 미뤄두고 있습니다. ^^

      • 몇번을 다시 읽어도 정확하게 이해는 안되지만,ㅋ
        사진이든 그림이든 프레임속 피사체에 대한 내용만을 본다면, 상상속 이미지로 보일 것이고, 그기에 어떠한 멘트나 글을 읽는 다면, 실재가 되겠지요.ㅋ...ㅠㅠ

        오늘 국어공부 많이 했습니다.하하하
        실제와 실재의 차이에 대해서 확실히 공부한 좋은 기회였습니다.

      • 서관덕님도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읽으셨겠지만, 저는 그 중 온실사진에 유독 관심이 있어 바르트가 책 초입에 언급한 장 폴 사르트르의 <상상계>를 읽게 되었습니다. <상상계>를 읽고 나서 며칠 전부터 조금씩 <밝은 방>을 다시 읽고 있어요. 또 다시 다른 느낌이 들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

        항상 그렇지만,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이렇게 말씀도 전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댓글의 내용을 읽고 또 여러가지 생각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 비밀댓글입니다

      • 그런 보관은 참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
        말씀처럼 그 예견은 참 대단합니다. 지금 막 옮긴이의 해제를 읽고 있는데요, 몇 줄 만으로도 딱 이해가 되더군요. '구텐베르크 시대'의 종말은 더욱 현실화되는 듯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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