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텍스트' 기억 저장소로서의 디지털 이미지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대화라 할 수 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특정집단에 속한 우리와의 대화이다. 연서가 그렇고 가족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가 그렇다.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폐쇄적인 특징이 있는데 메시지는 허락된 이(들)에게만 전달돼야하며 읽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일기는 나만 볼 수 있다는 무언의 계약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일기를 볼 때 뭔가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무언의 계약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가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였다면,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는 열린 공간에서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화를 구성한다. 물론, 디지털 공간에도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와 같은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은 존재한다. 비밀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비밀글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아는 사용자에게만 공개된다. 이처럼 비밀글은 여전히 지난날의 대화를 지속하고 있다.
지극히 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면, 이미지의 내적 요인인 마음과 외적 요인인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것은 누군가에게 공개될 운명을 타고 난다. 사적이라 생각한 이미지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이 변해 공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시간의 힘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 비록 그 물질성 때문이겠지만 바로 그 물질성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폐쇄적인 특성을 간직한 채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비물질성을 가진 디지털 세계에서는 시간의 힘을 물리칠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당초 그것은 부질없는 논란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장소로서 디지털 세계에 저장된 세계는 늘 같은 모습으로 그렇게 존재한다. 비록 내 마음이, 내 의도가 생생하고 디지털 세계에 저장된 이미지도 또한 생생할지라도 둘은 같지 않다.
주형일은 베르그송의 순수 기억과 지속의 시간 개념을 빌려 디지털이미지는 지속보다는 지각되는 존재라고 말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화되면서 기억은 지각을 닮는다. 그러나 디지털이미지는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드러나지 않을 뿐 발견될 존재이다.
잠재적 상태에 있는 디지털이미지는 지속적 시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의 보존은 오히려 시간의 멈춤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안에서 성정하는 과거의 보존이 아니다. 잠재적 상태의 디지털이미지는 무한정 스스로를 만들어내지만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다. 디지털이미지의 기록은 순전히 현재의 행위이다. 그리고 디지털이미지는 그것이 현재화되기까지 순수 현재로서 존재한다. 기록된 디지털이미지의 현재화되기까지 순수 현재로서 존재한다. 기록된 디지털이미지의 현재화는 과거를 현재의 이름으로 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하는 행위이다. 기록된 디지털이미지는 잠재적 과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현재이다. 따라서 잠재적 상태의 디지털이미지는 지속되는 존재로서 실재인 것이 아니라 지각해야 할 현재로서 실재이다.
주형일, 『이미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영남대학교출판부, 2006, 223-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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