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채플린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1930년대에 출판되었다. 출판 시기를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처음 이 구절을 읽고 혼란스러웠던 것은 벤야민이 예로 언급했던 피카소와 채플린이었다. 회화와 영화를 비교하면서 두 분야의 거장을 언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뜻한 의미는 무엇일까?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최근 인천에서 피카소의 전시회가 있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간 것으로 보도되었고 여러 개인 블로그에 감상 기사가 게재되었다.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사 내용을 보면 벤야민이 언급했던 낙후된 태도보다는 진보적 태도가 보인다는 점이다. 기술복제로 인해 바라보는 태도에 변화가 온 점이다.

피카소의 진품을 쉽게 볼 수 없었던 시대에는 그 이름만으로 알 수 없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진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기술의 발달로 수많은 복제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진의 발달과 더불어 폭발적인 파급효과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여러 거장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피카소 전시회도 기술복제시대의 영향을 받았다. 진품을 볼 수 있다는 흥분보다는 어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흥미일 뿐이다. 현재의 시대적 인식으로 앞서 언급한 구절을 이해하려 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쉽게 복제할 수 없었던 회화의 특성으로 대중은 낙후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찰스 스펜서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채플린, 정확히는 그의 무성영화가 언급된 이유는 대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중성은 다양한 국가의 이주민으로 구성된 대중에게 더욱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정 언어로 보급된 영화라면 특정 대중만이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채플린은 발성영화를 거부하고 말 없는 무성영화를 고집했다.

채플린의 무성영화로 대중의 체험 범위가 확대되었다. 비록 들을 수는 없지만, 더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었다. 채플린의 익살스러운 동작은 대중을 끌어안았고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여러 언어로 자막 처리된 영화가 전 세계로 보급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말이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 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길, 2007, 134쪽

이제는 피카소의 예술작품을 보고 과거와 같이 비판 없는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구경꾼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채플린의 영화를 보고 수동적 태도를 보이는 구경꾼이 더 많아진 듯한 느낌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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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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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댓글입니다

      • 아, 누누히 말씀하셨던 것이 이것이군요. 이제 좀 이해가 갑니다. 말씀처럼 욕망, 소유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어찌할 수 없는 딜레마가 아닐까 싶습니다.

        진보와 보수에 대해서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굉장히 상대적이 아닌가 싶어요. 또한, 진보냐 보수냐를 판단하는 것은 미래의 몫이 아닐까 싶더군요. 단순할지 모르겠지만, 시대적 상황에서 평가되는 개념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예술에 있어서 대중과 특정 계층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방식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외에 대중 혹은 특정 계층으로 합류할 수 있는 또 다른 군중도 존재하니 말이죠.

        음, 저도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되지 않았지만, 말씀하신 사항은 앞으로도 저와 함께 계속 토론거리로 화자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 점심 먹으면서 좀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욕구와 소유에 대해서 말이죠.

        진보와 보수를 생각해보니 보수와 진보가 맞겠더군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선대와 후대의 관계였습니다. 선대를 뛰어넘는자가 후대가 아닐까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후대가 그대로 선대가 될 수 있겠지만 말이죠. 어떤 후대에 왔을 때 선대를 넘어서는 계기가 발생한다면, 비로소 보수와 진보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까 싶더군요.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선대의 '의지'가 이어져야 하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의지가 이어지지 않은 후대는 아무리 선대를 뛰어넘더라도 진보라 평가될 수 없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의지 자체가 파기되는 혁명이 발생하기도 하지만 말이죠. 옅은 사유라 반론이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

        욕구와 소유는 참 멜랑콜리 합니다만, 예전에 그냥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LP판을 구매하고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술이 발달해서 CD판으로 구매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문제는 그 이후로 음악을 즐겨 듣지 않게 되더군요. MP3의 등장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음악을 거의 듣지 않습니다. 이래서 청각이 더 약화되었을 수도 있겠어요. 어찌되었든, 그 LP판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어서 그런지 욕구에 의한 소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욕구가 사진과 글쓰기로 대체되어서 다행이지만 말이죠. ^^

      • 피카소와 채플린...
        앞서 나간 인물들을 이해하기에는 참 많이 부족한 저자신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군요^^

      • 윽, 저도 전문적으로 아는 사실은 없습니다.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니 부담은 가지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 피카소도 채플린도 전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 제목이 피카소와 채플린이지만, 사실 회화와 영화에 대한 단상을 적은 글입니다. 덧붙이자면, 제가 회화와 영화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죠. 다만, 일부분의 특성을 통해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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