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46(시선)

Desire Durand, ‘Baby in a bonnet and a long gown’, 프랑스, 1860년.

사진은 두 눈으로 똑바로 나를 바라보는 그 힘(정면의 포즈가 보통 시대에 뒤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사진은 이 힘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어떻게 보지 않고 쳐다볼 수 있는가? 사진은 주의력을 지각과 분리시키고 전자만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후자 없이 전자는 불가능하다. 괴상한 일이지만, 이런 현상은 노에마 없는 노에시스이고, 사유 없는 사유행위이며, 목표물 없는 조준이다.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6, 137쪽.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46장을 읽고 있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매번 읽으면서 문장의 뜻이 다르게 다가온다. 단어조차도 다르게 해석되니 한탄스럽다. 현실은 그렇지만, 적지 않고서는 기억할 수 없으니 한스러운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바르트가 다음 장에서도 언급했지만, 현상학적으로 이미지는 부재를 의미한다. 사진에 있는 BABY는 BABY가 아니라는 뜻이다. 쉽게 말한다면, 끈을 턱밑에서 묶어 고정한 모자를 쓰고 꽤 긴 드레스를 입은 '아기사진'이다. 추가로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아기를 받치고 있는 '가족사진'이다.

Getty Search Gateway에서 본 1860년대 초상화는 대체로 정면을 바라보는 포즈는 드물다. 드물게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 있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손을 상의나 바지에 고정하는 포즈가 일반적이었다. 아마도 당시에 유행하는 포즈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런저런 사진을 보다 발견한 것이 바로 아기사진이다.

대상이 아기라는 차이점과 함께 성인 사진과 비슷한 시선을 가지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실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사진이다. 유행의 닮음을 발견했다는 쾌감이 그 이유이다. 또한, 아버지 세대에서 아기 세대로 고착되는 유행의 흔적은 꽤 즐거운 발견이었다.

아기는 어디를 보고 있었을까? 당시 사진가는 카메라의 천을 쓰고 숨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존재는 쉽게 어머니의 존재를 궁금하게 한다. 이런 이유로 아마도 사진가의 오른쪽에서 아기를 바라보며 아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았을까? 아기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그쪽을 응시한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가는 그 순간을 고정한다.

지금까지 사진이 이미지로써 부재를 의미한다는 점과 사진 속 상황을 상상으로 재현해 보았다. 이런 유추는 '그것은 존재했다'와 '바로 이것이다'를 함축한다. 사진을 통해 아기는 존재했고 아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비록 실재 아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한 장의 사진을 통해 즐거운 상상을 가지는 시간, 꽤 즐겁다.

이미지 맵

롤랑존

사진을 읽는다는 것. 글쓰기. R을 알아가는 집생.

    '보고 읽고 쓰기/밝은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에 남긴 여러분의 의견은 4개 입니다.

      • 비밀댓글입니다

      • 사진공간 배다리에는 '느긋한 모임: 밝은 방'이라는 소모임이 있습니다. 기쁘게도 저도 차주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지난 모임에서는 <밝은 방> 1부를 두고 담론을 펼쳤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유로 며칠 롤랑 바르트의 이 책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혼란스러운 것은 제가 기본 소양이 부족한 점도 있지만, 항상 따라다니는 매끄러운 번역의 부재입니다. 어찌되었건 차주가 참 기다려지는군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