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카테고리의 글 목록 12개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자유학습의 일환으로 이기원 씨를 초빙해 그의 강의도 듣고 함께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기원 씨와 세 시간 정도를 함께했는데 좀 더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서로 친밀해지는 시간도 부족했고 서로 몸담고 있는 곳도 달라 같은 방향을 보며 얘기하지 못한 것 같다.『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주형일 쓴 책 제목이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 다른 의미로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가 떠오른다. 존 버거는 이미지의 의미는 말로 할 수 없다는 코드화되지 않는 메시지로 ‘본다는 것’을 바라본 반면, 주형일은 말로 할 수 있다는 코드화된 메시지로 ‘본다는 것’으로 본 것 같다.이제는 이미지를 본다는 것을 넘어 읽는다는 의미를 찾아야할 시점이다.

자유학습의 일환으로 이기원 씨를 초빙해 그의 강의도 듣고 함께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기원 씨와 세 시간 정도를 함께했는데 좀 더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서로 친밀해지는 시간도 부족했고 서로 몸담고 있는 곳도 달라 같은 방향을 보며 얘기하지 못한 것 같다.『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주형일 쓴 책 제목이다.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 다른 의미로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가 떠오른다. 존 버거는 이미지의 의미는 말로 할 수 없다는 코드화되지 않는 메시지로 ‘본다는 것’을 바라본 반면, 주형일은 말로 할 수 있다는 코드화된 메시지로 ‘본다는 것’으로 본 것 같다.이제는 이미지를 본다는 것을 넘어 읽는다는 의미를 찾아야할 시점이다.

'이미지와 텍스트' 텍스트가 없던 시대의 상상적 사고

'이미지와 텍스트' 텍스트가 없던 시대의 상상적 사고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기술적 영상은 장치를 이용해 만들어진 그림이다.” 이것은 빌렘 플루서가 기술적 영상을 정의한 것인데 사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우리는 사진기를 이용해 사진 그러니까 그림을 만든다. 사진기로 생산된 그림은 실제와 너무도 흡사하다. 우리가 그림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림 표면위에 있는 어떤 대상의 흔적인데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텍스트를 중심으로 그림은 전역사적이고 기술적 영상은 탈역사적이다. 그림은 텍스트가 생기기 전 우리와 세계를 매개했고 기술적 영상은 텍스트 이후에 우리와 세계를 새롭게 매개하고 있다. 개념화에 따른 텍스트 사고를 배제한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우리는 이미 텍스트 시대를 ..

“기술적 영상은 장치를 이용해 만들어진 그림이다.” 이것은 빌렘 플루서가 기술적 영상을 정의한 것인데 사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우리는 사진기를 이용해 사진 그러니까 그림을 만든다. 사진기로 생산된 그림은 실제와 너무도 흡사하다. 우리가 그림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것은 그림 표면위에 있는 어떤 대상의 흔적인데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는 것과는 다르다.텍스트를 중심으로 그림은 전역사적이고 기술적 영상은 탈역사적이다. 그림은 텍스트가 생기기 전 우리와 세계를 매개했고 기술적 영상은 텍스트 이후에 우리와 세계를 새롭게 매개하고 있다. 개념화에 따른 텍스트 사고를 배제한 그림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우리는 이미 텍스트 시대를 ..

'이미지와 텍스트' 인쇄언어와 이미지의 결합

'이미지와 텍스트' 인쇄언어와 이미지의 결합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인쇄언어는 문자를 인쇄하는 기기를 통해 드러난 시각문자이다. 시각문자는 동일한 크기의 문자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각적으로 사용할 때 그 효과가 크다. 배우 나문희의 ‘호박고구마’ 장면을 인쇄언어로 표현할 경우, 점점 커지는 문자 크기와 느낌표로 감정을 나타낸다.배우 나문희가 열연한 ‘호박고구마’를 알지 못 한다면 단순히 시각문자만으론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탤런트 권혁수의 성대모사가 더 잘 알려진 탓도 있다. 그렇다면 권혁수의 성대모사 장면에 단순히 문자만을 추가할 경우, 어떻게 달라질까?원작보다 다소 과장된 연기 탓도 있지만 권혁수의 성대모사가 탁월한 탓에 사진만으로도 처절하고 울분 넘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영상은 소리가 덧붙여지면서 완전한 하나의 매..

인쇄언어는 문자를 인쇄하는 기기를 통해 드러난 시각문자이다. 시각문자는 동일한 크기의 문자를 일렬로 나열하는 방식보다는 감정을 드러내거나 감각적으로 사용할 때 그 효과가 크다. 배우 나문희의 ‘호박고구마’ 장면을 인쇄언어로 표현할 경우, 점점 커지는 문자 크기와 느낌표로 감정을 나타낸다.배우 나문희가 열연한 ‘호박고구마’를 알지 못 한다면 단순히 시각문자만으론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탤런트 권혁수의 성대모사가 더 잘 알려진 탓도 있다. 그렇다면 권혁수의 성대모사 장면에 단순히 문자만을 추가할 경우, 어떻게 달라질까?원작보다 다소 과장된 연기 탓도 있지만 권혁수의 성대모사가 탁월한 탓에 사진만으로도 처절하고 울분 넘치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영상은 소리가 덧붙여지면서 완전한 하나의 매..

'이미지와 텍스트' 샤프로 글쓰기

'이미지와 텍스트' 샤프로 글쓰기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연필을 고집하기도 하고 익숙한 키보드로 글을 쓰다가 다시 샤프로 글을 쓴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외부의 심한 압박 탓이다. 아날로그 감성의 안성기가 아니라 스마트한 감각의 안성기라는 반전 광고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특정한 위치에 서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것은 나만의 스타일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일이다.연필은 그것만의 물질성이 있다. 내 감성은 섬세하지 않다. 세밀하지도 않으며 강박에 익숙해있다. 쓰던 제품을 계속 쓰는 이유는 그 익숙함 때문이다.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쓰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두 물질의 거침이 클수록 그러니까 마찰력이 클수록 그 소리는 더 강하다. 하지만 난 두 물질이 충돌하는 매순간을 알아채지 못한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

연필을 고집하기도 하고 익숙한 키보드로 글을 쓰다가 다시 샤프로 글을 쓴다. 이것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외부의 심한 압박 탓이다. 아날로그 감성의 안성기가 아니라 스마트한 감각의 안성기라는 반전 광고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특정한 위치에 서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것은 나만의 스타일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스타일이다.연필은 그것만의 물질성이 있다. 내 감성은 섬세하지 않다. 세밀하지도 않으며 강박에 익숙해있다. 쓰던 제품을 계속 쓰는 이유는 그 익숙함 때문이다.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쓰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난다. 두 물질의 거침이 클수록 그러니까 마찰력이 클수록 그 소리는 더 강하다. 하지만 난 두 물질이 충돌하는 매순간을 알아채지 못한다.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

'이미지와 텍스트'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다시 읽으며

'이미지와 텍스트'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다시 읽으며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이미지에 대한 짧은 생각 후 텍스트를 살피고 있다. 텍스트를 살피려면 적당한 입문서를 찾아야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난해하지만 그동안 읽고 있던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통해 옮긴이가 말하는 의사소통보다는 생산성을 재현보다는 상징을 언표보다는 언술행위를 살펴보려 한다. 이는 바르트의 생각이기 보다는 옮긴이의 생각이며 시대의 흐름이자 트래픽이다. 아직은 온전히 내 생각을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옮긴이의 생각을 토대로 바르트의 텍스트론을 살펴보려 한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의사소통·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상징화·생산성..

이미지에 대한 짧은 생각 후 텍스트를 살피고 있다. 텍스트를 살피려면 적당한 입문서를 찾아야 하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난해하지만 그동안 읽고 있던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통해 옮긴이가 말하는 의사소통보다는 생산성을 재현보다는 상징을 언표보다는 언술행위를 살펴보려 한다. 이는 바르트의 생각이기 보다는 옮긴이의 생각이며 시대의 흐름이자 트래픽이다. 아직은 온전히 내 생각을 말하기 힘들기 때문에 옮긴이의 생각을 토대로 바르트의 텍스트론을 살펴보려 한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의사소통·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상징화·생산성..

'이미지와 텍스트' 기억 저장소로서의 디지털 이미지

'이미지와 텍스트' 기억 저장소로서의 디지털 이미지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대화라 할 수 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특정집단에 속한 우리와의 대화이다. 연서가 그렇고 가족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가 그렇다.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폐쇄적인 특징이 있는데 메시지는 허락된 이(들)에게만 전달돼야하며 읽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일기는 나만 볼 수 있다는 무언의 계약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일기를 볼 때 뭔가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무언의 계약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가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였다면,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는 열린 공간에서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화를 구성한다. 물론, 디지털 공간에도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와 같은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대화라 할 수 있다. 나와 너 혹은 나와 특정집단에 속한 우리와의 대화이다. 연서가 그렇고 가족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가 그렇다.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는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폐쇄적인 특징이 있는데 메시지는 허락된 이(들)에게만 전달돼야하며 읽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다. 일기는 나만 볼 수 있다는 무언의 계약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 일기를 볼 때 뭔가 죄를 짓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 무언의 계약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에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가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였다면,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는 열린 공간에서 담론을 이끌어내는 대화를 구성한다. 물론, 디지털 공간에도 편지, 전보 그리고 엽서와 같은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이미지와 텍스트' 기술영상시대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이미지와 텍스트' 기술영상시대에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아직 확신은 없지만, 토론에서 제기된 ‘자유’의 의미를 살펴본다.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자유’를 말하려고 하는가. 바로 기술영상시대에서 빌렘 플루서가 말한 ‘자유’에 대한 의미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노예’로 인식한다. 여기서 ‘노예’는 억압된 대상이며 자유롭지 않은 대상을 말한다. 스마트폰의 좋지 않은 면도 있는 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리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글이나 촬영한 사진을 전달하기 위해 늘 사용하는 기기이다. 물론, 누군가 겪은 일을 알기 위해 사용하는 기기이기도 하다.글이나 그림을 그리는 대표적인 도구는 펜일 것이다. 펜을 통해 내가 겪은 일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려면 우리는 일단 그것을 추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겪은 일을 시시콜콜 전달하기도 힘들뿐만..

아직 확신은 없지만, 토론에서 제기된 ‘자유’의 의미를 살펴본다. ‘자유’란 무엇인가. 어떤 ‘자유’를 말하려고 하는가. 바로 기술영상시대에서 빌렘 플루서가 말한 ‘자유’에 대한 의미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노예’로 인식한다. 여기서 ‘노예’는 억압된 대상이며 자유롭지 않은 대상을 말한다. 스마트폰의 좋지 않은 면도 있는 반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알리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글이나 촬영한 사진을 전달하기 위해 늘 사용하는 기기이다. 물론, 누군가 겪은 일을 알기 위해 사용하는 기기이기도 하다.글이나 그림을 그리는 대표적인 도구는 펜일 것이다. 펜을 통해 내가 겪은 일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려면 우리는 일단 그것을 추상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겪은 일을 시시콜콜 전달하기도 힘들뿐만..

'이미지와 텍스트' 현실에서 만난 램프의 요정 지니

'이미지와 텍스트' 현실에서 만난 램프의 요정 지니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양면의 물성이 있는 엽서는 디지털 코드로 변환되어 단면의 물성을 띈다. 물론, 그 물성은 스크린(모니터)을 매개로 한다. 막연히 존재할 것 같으나 볼 수 없는 디지털 코드는 프로그램을 통해 가시화되고 스크린을 통해 물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변화로 수신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손으로 종이의 표면을 매만지는 행위는 발신자를 어루만지는 애무와 다를 바 없다. 만약 발신자가 보낸 엽서가 향기가 나는 종이라면 그 향기는 곧 발신자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된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손으로 램프를 어루만지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는 마법과 같다. 그러나 디지털 코드가 가시화된 엽서(스크린)를 문지른다고 해서 램프의 요점 지니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이미 마법은 실현된 상태..

양면의 물성이 있는 엽서는 디지털 코드로 변환되어 단면의 물성을 띈다. 물론, 그 물성은 스크린(모니터)을 매개로 한다. 막연히 존재할 것 같으나 볼 수 없는 디지털 코드는 프로그램을 통해 가시화되고 스크린을 통해 물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변화로 수신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일까? 손으로 종이의 표면을 매만지는 행위는 발신자를 어루만지는 애무와 다를 바 없다. 만약 발신자가 보낸 엽서가 향기가 나는 종이라면 그 향기는 곧 발신자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된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처럼 손으로 램프를 어루만지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는 마법과 같다. 그러나 디지털 코드가 가시화된 엽서(스크린)를 문지른다고 해서 램프의 요점 지니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이미 마법은 실현된 상태..

'이미지와 텍스트' 단면으로 구성된 그림과 텍스트

'이미지와 텍스트' 단면으로 구성된 그림과 텍스트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마치 전보에 적힌 글이 발신자의 신체를 지시하지 않듯, 엽서에서의 그림은 요즘 디지털이미지를 인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즉 그것을 그렸거나 혹은 촬영한 이를 떠올리기보다는 하나의 메시지로 인식한다. 장소를 나타내는 그림, 크리스마스와 같이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그림 등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을 지시한다.흥미로운 것은 엽서에 있는 그림이나 사진의 영역, 내용이 들어갈 텍스트의 영역이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점이다. 오직 그 영역을 정당하게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우체국) 직인뿐이다. 적을 내용이 많은 경우, 발신자는 문서 편집기에서 폰트를 줄이는 것처럼 글씨체를 작게 적는 정도였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엽서의 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면은 그림이 뒷면은 글을 쓸 공간으로 구성된 탓이다..

마치 전보에 적힌 글이 발신자의 신체를 지시하지 않듯, 엽서에서의 그림은 요즘 디지털이미지를 인식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즉 그것을 그렸거나 혹은 촬영한 이를 떠올리기보다는 하나의 메시지로 인식한다. 장소를 나타내는 그림, 크리스마스와 같이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그림 등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을 지시한다.흥미로운 것은 엽서에 있는 그림이나 사진의 영역, 내용이 들어갈 텍스트의 영역이 엄격하게 지켜졌다는 점이다. 오직 그 영역을 정당하게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우체국) 직인뿐이다. 적을 내용이 많은 경우, 발신자는 문서 편집기에서 폰트를 줄이는 것처럼 글씨체를 작게 적는 정도였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엽서의 구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앞면은 그림이 뒷면은 글을 쓸 공간으로 구성된 탓이다..

'이미지와 텍스트' 노동으로써의 편지, 그림엽서 그리고 전보

'이미지와 텍스트' 노동으로써의 편지, 그림엽서 그리고 전보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편지 지금 내가 써내려가는 하얀 공책처럼 편지지에 손 글씨로 써내려간 글은 편지를 받는 이(수신자)를 위한, 수신자만을 위한 말의 흔적이다. 수신자는 편지에 적힌 글씨를 통해 글을 쓴 이(발신자)를 떠올린다. 선명하지는 않겠지만, 수신자는 마지막으로 봤던 발신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편지를 읽는다. 수신자는 발신자가 그의 손으로 쓴 글 표면의 굴곡을 따라 발신자를 만난다. 편지는 단지 말의 흔적이기 보다는 발신자의 신체이자 곧 그 자체를 엿볼 수 있는 매개이다. 전보(1830년대) 전보는 발신자가 적은 메시지를 전기신호로 변환 후 편지 혹은 엽서와 같은 형태로 변환된다. 발신자가 신체를 통해 작성한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발신자가 편지 방식으로 작성된 메시지는 전기신호로 변환되고 이를 다시 문자로 기록한..

편지 지금 내가 써내려가는 하얀 공책처럼 편지지에 손 글씨로 써내려간 글은 편지를 받는 이(수신자)를 위한, 수신자만을 위한 말의 흔적이다. 수신자는 편지에 적힌 글씨를 통해 글을 쓴 이(발신자)를 떠올린다. 선명하지는 않겠지만, 수신자는 마지막으로 봤던 발신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편지를 읽는다. 수신자는 발신자가 그의 손으로 쓴 글 표면의 굴곡을 따라 발신자를 만난다. 편지는 단지 말의 흔적이기 보다는 발신자의 신체이자 곧 그 자체를 엿볼 수 있는 매개이다. 전보(1830년대) 전보는 발신자가 적은 메시지를 전기신호로 변환 후 편지 혹은 엽서와 같은 형태로 변환된다. 발신자가 신체를 통해 작성한 메시지는 전달되지 않는다. 발신자가 편지 방식으로 작성된 메시지는 전기신호로 변환되고 이를 다시 문자로 기록한..

'이미지와 텍스트' 머리말

'이미지와 텍스트' 머리말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카드’를 접두어로 사용하는 ‘카드뉴스’는 어떤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체의 한 형식이다. ‘카드뉴스’는 결코 ‘카드’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뉴스’와 같이 기존에 존재했던 장르, 즉 그것을 설명하는 서술어가 따라붙는다. 앞으로 우리는 19번에 걸쳐 학교 밖 사람들을 대상으로 ‘카드’ 형태를 빌려 ‘교육’을 고민할 것이다.먼저 살펴볼 것은 ‘카드’를 구성하고 있는 그림과 텍스트의 고유한 특성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림과 텍스트가 합쳐지면 현실적일까? 반대로 가상에 기반을 둔 그림과 텍스트가 합쳐지면 비현실적일까? 조금은 난해하지만, 그림과 텍스트는 각각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살펴보면 둘이 합쳐진 형태의 ‘카드’에 대한 인식 고찰에 도움을 줄 것이다.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교육’이다. 여기서..

‘카드’를 접두어로 사용하는 ‘카드뉴스’는 어떤 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체의 한 형식이다. ‘카드뉴스’는 결코 ‘카드’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뉴스’와 같이 기존에 존재했던 장르, 즉 그것을 설명하는 서술어가 따라붙는다. 앞으로 우리는 19번에 걸쳐 학교 밖 사람들을 대상으로 ‘카드’ 형태를 빌려 ‘교육’을 고민할 것이다.먼저 살펴볼 것은 ‘카드’를 구성하고 있는 그림과 텍스트의 고유한 특성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그림과 텍스트가 합쳐지면 현실적일까? 반대로 가상에 기반을 둔 그림과 텍스트가 합쳐지면 비현실적일까? 조금은 난해하지만, 그림과 텍스트는 각각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살펴보면 둘이 합쳐진 형태의 ‘카드’에 대한 인식 고찰에 도움을 줄 것이다.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교육’이다. 여기서..

'이미지와 텍스트'를 시작하며

'이미지와 텍스트'를 시작하며

자유학습/이미지와 텍스트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늘 흥분되고 즐거움이 즐김으로 변화되는 사태이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자율학습을 지원하기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바쁜 일이도 일이거니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인과 함께 지원한 자율학습이 채택되어 이렇게 첫 글을 쓰고 있다.명칭은 ‘자율학습’이다. 하지만 난 이것을 ‘자유학습’이라 부르고자 한다.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시작된다. 학창 시절, 메마른 시멘트 바닥에서 퍼지는 인공의 냄새를 맡으며 어쩔 수 없이 했던 자율학습의 삭막한 경험 탓인지도 모른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 이것이 ‘자유학습’의 의미이다.앞으로 기록할 글들은 발제한 내용이나 지인과 함께 토론한 결과물 혹은 혼자만의 생각이..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늘 흥분되고 즐거움이 즐김으로 변화되는 사태이다. 인천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주관하는 자율학습을 지원하기까지 참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바쁜 일이도 일이거니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인과 함께 지원한 자율학습이 채택되어 이렇게 첫 글을 쓰고 있다.명칭은 ‘자율학습’이다. 하지만 난 이것을 ‘자유학습’이라 부르고자 한다.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은 억압으로부터 시작된다. 학창 시절, 메마른 시멘트 바닥에서 퍼지는 인공의 냄새를 맡으며 어쩔 수 없이 했던 자율학습의 삭막한 경험 탓인지도 모른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과정, 이것이 ‘자유학습’의 의미이다.앞으로 기록할 글들은 발제한 내용이나 지인과 함께 토론한 결과물 혹은 혼자만의 생각이..